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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 노승의 미인담(외)

1. 단재의 문학 관련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된 것들은 단재의 것으로 확인된 것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고는 내용 중에 단재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고, 문체 및 내용 면에서 단재의 작품으로 충분히 고증을 할 수 있는 것을 실었다. 2. 작품들은 발표 원전을 저본으로 삼았다. 다만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은 당시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고, 원전과 일일이 비교 검증하여, 번역에서 빠진 구절은 보완하였다. 원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번역은 바로 잡거나 따로 밝혀 두었다. 그리고 신문에 발표된 비평 기타의 글들도 원전을 일일이 대조하여 한 구절 한 자에 이르기까지 원전 확정에 주력하였다. 유고의 경우 비교적 원전에 가까운 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연변대학출판사,1994..
1. 단재의 문학 관련 작품들을 묶은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된 것들은 단재의 것으로 확인된 것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고는 내용 중에 단재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고, 문체 및 내용 면에서 단재의 작품으로 충분히 고증을 할 수 있는 것을 실었다.

2. 작품들은 발표 원전을 저본으로 삼았다. 다만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등은 당시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고, 원전과 일일이 비교 검증하여, 번역에서 빠진 구절은 보완하였다. 원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 번역은 바로 잡거나 따로 밝혀 두었다. 그리고 신문에 발표된 비평 기타의 글들도 원전을 일일이 대조하여 한 구절 한 자에 이르기까지 원전 확정에 주력하였다. 유고의 경우 비교적 원전에 가까운 김병민 편 《신채호문학유고선집》(연변대학출판사,1994)의 텍스트를 저본으로 삼고 《룡과 룡의 대격전》(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1966), 《단재신채호전집》(개정판, 형설출판사, 1977) 등과 대조하여 정본을 만들려 노력했다. 이들 텍스트 간의 차이를 밝혀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3. 원문을 가능하면 살리되,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현대 표기로 고치고, 필요한 한자는 부기하였다.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한자 문어는 우리말로 고쳤다.

4. 어려운 내용이나 한자 구절에는 주석을 달았다. 특히 《용과 용의 대격전》의 주석들을 그대로 활용하였으며, 그밖에도 《단재신채호전집》의 이은상의 주, 《꿈하늘》(동광출판사, 1990)의 강명관의 주석 일부, 그리고 야후 사전의 설명 등도 독자의 이해의 편의를 위해 차용하였다.

5. 발표 연도나 게재지, 또는 출판사를 글의 앞, 또는 글 뒤에 밝혀 놓았다.

6. 독자들이 이해하기 편리하도록 왕년王年이나 연호는 서기 년을 괄호 안에 병기했다.
1880년
11월 7일 충남 대덕군大德郡 산내면山內面 어남리於南里에서 아버지 신광식申光植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고령. 필명으로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재丹齋 무애생無涯生, 금협산인錦頰山人, 한놈, 적심赤心, 연시몽인燕市夢人 등이 있다.
1887년(8세)
아버지가 38세로 별세. 가세는 영락했으나 할아버지가 향리에서 작은 한문 사숙을 열어 놓고 있었으므로, 이 사숙에 들어가 엄격한 한문 교육을 받았다. 9세에 통감을 해독하고, 10세에 시를 지었으며, 14세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다 한다.
1895년(16세)
향리에서 풍양 조씨와 결혼하였다.
1897년(18세)
구한말에 재상이었던 신기선申箕善의 사저를 드나들며 많은 책을 섭렵하였다.
1898년(19세)
상경하여 성균관에 입교.
1905년(26세)
성균관 박사가 됨. 장지연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위원에 위촉되었다.
1906년(27세)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에 취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28세)
번안서인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광학서포에서 발행. 양기탁, 안창호, 이동녕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그 취지문을 기초하였다.
1908년(29세)
순한글 잡지 《가정잡지》를 편집 및 발행. 《대한매일신보》에 〈이순신전〉과 〈독사신론〉을 연재하는가 하면, 휘문관에서 《을지문덕》을 발행하고, 《대한매일신보》《대한협회회보》《기호흥학회월보》에 논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문필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30세)
《대한매일신보》에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연재하였다. 이 시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으며, 부인 조씨와는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1910년(31세)
4월에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지 규합을 목표로 《권업신문勸業新聞》《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행하였다.
1913년(34세)
병고와 생활고를 겪었으며, 신규식의 초대로 상해행. 망명 동지들과 교유하였다.
1914년(35세)
조선사 관계 자료를 수집하고 그 집필에 착수. 백두산과 남북 만주 일대, 고구려 광개토왕비 등을 답사하였다.
1915년(36세)
조선상고사의 집필을 구상하였으며, 신규식 등과 신한청년회를 조직하고, 박은식, 문일평 등과 박달학원을 세웠다.
1916년(37세)
〈꿈하늘〉 집필. 나철이 자결하자 대종교 운동에 참여하였다.
1918년(39세)
북경에 있는 보타암이라는 암자에서 조선사 집필. 《중화보》《북경일보》 등에 논설을 실었으나 신문사의 교정 잘못을 질타하고 집필을 거절하였다.
919년(40세)
대한독립청년단 단장이 되고, 신대한동맹단의 부단주로 활동였다.
1920년(41세)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북경에 망명 유학중인 박자혜와 결혼하였다.
1921년(42세)
《천고》를 발간. 맏아들 수범 출생. 김창숙, 이극로 등과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이승만성토문〉을 발표하였다.
1922년(43세)
관음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불경 독파. 이때 《조선사통론》 《문화편》 《강역고》 등 조선사 관련 저서를 여러 권 저술하였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고 있다.
1923년(44세)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기초하고, 민중의 직접 폭력 혁명을 주창. 북경대학 이석증李石曾의 소개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섭렵하였다.
1924년(45세)
《동아일보》에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고사상 이두문 명사 해석법〉 등을 실었다.
1925년(46세)
《동아일보》에 〈낭객의 신년 만필〉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1대 사건〉 등을 연재하는 등 이 시기 여러 편의 역사 관련 글들을 발표하였다.
1927년(48세)
신간회新幹會 발기인 참여.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고 《동방》을 발행하였다.
1928년(49세)
조선사 연구에 열중하다가 시력이 악화되어 부인과 장남을 북경으로 부름. 조선일보에 〈예언가가 본 무진〉을 발표하였으며, 〈용과 용의 대격전〉을 집필하였다. 조선인 무정부주의자들의 북경회의인 동방연맹대회에 참여하여 선언문을 기초하는 등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5월 8일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국제위체國際爲替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9년(50세)
차남 두범 출생.
1930년(51세)
5월 대련 법정에서 10년 실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에 복역. 조선 고대사 관련 논문들이 동지들의 주선으로 《조선사연구초》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1931년(52세)
《조선일보》에 《조선사》 《조선상고문화사》를 연재하였다.
1935년(56세)
건강이 악화되어 형무소 당국이 보호해줄 사람이 있으면 출감을 허용하겠다고 통고, 이에 친지들이 선생의 옛 친구이자 친일파 부호 한 사람의 보증 아래 가출옥을 종용했으나 선생은 친일파의 보증으로 출옥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1936년(57세)
2월 18일 뇌일혈로 의식불명. 2월 21일(음력1월 28일) 오후 4시 20분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여순 감옥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봉안해 옴. 유골은 청원군淸原郡 낭성면琅城面 귀래리歸來里 상당산上黨山 기슭 선생이 살던 옛 집터에 암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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