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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부조리 문학의 대표작 카뮈의 《이방인》 실존주의 문학의 승리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평범하고 정직한 인간이 자기 의도와 다르게 부조리한 사건에 말려들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기성사회의 관례와 허식이 가득한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뫼르소는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그 벽을 뚫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근원적 사실 앞에 겨우 깨닫는다. 카뮈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뫼르소를 통해 인생의 부조리를 조명한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나 또한 모든 걸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준 것처럼. 이 조짐과 별이 드리운 밤 아래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나와 다름없음을 느끼며 ..
부조리 문학의 대표작 카뮈의 《이방인》

실존주의 문학의 승리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평범하고 정직한 인간이 자기 의도와 다르게 부조리한 사건에 말려들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기성사회의 관례와 허식이 가득한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뫼르소는 부조리함을 느끼지만 그 벽을 뚫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근원적 사실 앞에 겨우 깨닫는다. 카뮈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뫼르소를 통해 인생의 부조리를 조명한다.

“누구도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다. 나 또한 모든 걸 다시 살아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커다란 분노가 나의 괴로움을 씻어주고 희망을 안겨준 것처럼.
이 조짐과 별이 드리운 밤 아래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계가 나와 다름없음을 느끼며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게 이루어졌고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남은 소원은 사형을 집행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을 울리며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뫼르소는 죽음에 직면해 “아침에 일어나 속옷을 갈아입는 인간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프랑스 국민―혹은 독일 국민, 중국 국민이든―이라는 지극히 모호한 관념에 의거하여 선고”된 타살이 아니라 거짓과 모든 가식을 버리고 세계와 연결된 자신의 삶과 삶에 대한 피로, 자유를 의식하며 자발적인 죽음을 택한다.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신문기자들은 벌써 만년필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심히 비웃는 듯한 태도였다. 플란넬 셔츠에 하늘색 넥타이를 맨 아주 젊은 청년 한 사람만 만년필을 앞에 놓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피고석이라고 해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검사와 변호사 두 사람의 논고와 변론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변호사는 범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이고 검사는 죄를 고발하고 손가락질하며 여지를 주지 않을 따름이다.
한 가지 난처한 일이 있었다. 나는 생각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으나 때로는 발언하고 싶었다. 변호사는 “가만히 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 됩니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사건이 나와 아무런 관계없이, 모든 것이 나를 참여시키지 않고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운명이 결정되었다. 때때로 사람들의 말을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로서 할 말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다.” (본문 중에서)

분량이 많거나 어려운 책을 읽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체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느 시인의 문장처럼 “펼쳤다가 내려놓는 형편없는 독서”를 하게 된다. 범우다이제스트는 독자들이 문학의 향취를 물큰 느끼면서 또한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기획했다.
다이제스트(Digest)는 ‘요약’ ‘소화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요약은 자신이 소화한 내용으로 자기만의 이해의 속도를 정리하는 일이다. 다이제스트를 통해 속도와 깊이를 갖는 독서의 방식을 고민했다. 독자들과 나눌 수 있는 고민이기를 고대하며 다이제스트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독서가 가능하길. 새로운 독서와 독자의 자리를 고민했다. 조금 다르고 특별한 읽기를 통해 부정적 긍정성으로서 읽기의 효용을 생각했다.
범우다이제스트를 통한 세계문학의 복기.
알베르 카뮈는
1913년 11월 7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콘스탄틴 주 몽도비에서 태어났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마른 전투에서 아버지 뤼시앵 카뮈가 전사하고 청각장애 어머니 카트린느 생트와 알제 시의 빈민가 벨쿠르구의 리용가로 이사한다.
1918년 오메라가의 공립초등학교 입학,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선생님 덕분에
1923년 10월 알제 중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훗날 그가 회고한 것처럼 그는 자유를 마르크스에게서 배우는 대신(대학시절 그는 한때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했었다) 가난 속에서 배웠다.
1930년 바칼로레아(대학 입학자격 국가고시)에 합격, 운동을 좋아하는 청년으로서 알제 대학 축구단 입단하지만 폐결핵 증상이 나타난다.
1931년 알제 대학 문학부 상급반 수업에서 장 그르니에를 만나게 되고 카뮈에게 평생의 스승이 된다.
1934년 첫 번째 결혼을 하고
1935년 알제 방송 극단의 배우로 알제리 각지를 순회공연하며, 《안과 밖》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노동극단을 창단하여 말로의 《모멸의 시대》를 각색해 상연하고 정치극 〈아스튀리의 반란(Révolte dans les Asturies)〉을 공동집필한다.
1936년 플로티노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통해 본 헬레니즘과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쓴 졸업논문 〈기독교와 신플라톤주의의 형이상학〉이 통과되고 알제의 샤를르 출판사에서 《아스튀리의 반란》을 간행한다. 말로에 관한 평론 집필 시도하고 그 해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다.
1937년 건강상의 문제로 철학 교수 자격시험을 포기하게 된다. 샤를르 출판사에서 《안과 밖》을 간행하고 극단 〈에퀴프〉를 창단한다.
1938년 《이방인》 집필을 시작하고 《알제 레퓌블리캥》에서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며, 10월 20일에는 사르트르의 《구토》 서평을 쓴다. 그리고 같은 해 〈칼리굴라〉를 집필한다.
1939년 단편 〈여름〉 발표, 《결혼》을 발간하고
1940년 재혼을 한다. 알제리에서 추방되어 파리로 망명해서 《파리 스와르》지의 기자로 일한다. 5월 《이방인》 집필을 끝내고 9월 《시지프의 신화》를 집필하기 시작한다.
1941년 《시지프의 신화》 탈고하며, 멜빌의 《모비딕》 영향으로 《페스트》의 집필을 준비한다.
1942년 《이방인》이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간행된다. 《콩바》지에 참여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동참한다.
1943년에는 《콩바》지의 파리 주재기자가 된다. 갈리마르 출판사에 교열위원으로 입사한 뒤 《콩바》지의 지하 발행, 《시지프의 신화》 간행하고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상권을 간행한다.
1944년 사르트르를 만나 친분을 맺는다. 5월 마튀랭 극장에서 희곡 〈오해〉를 상연하고 같은 해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하권을 간행한다.
1945년 에베르토 극장에서 〈칼리굴라〉 상연,
1947년 7월 《페스트》 간행해 비평상을 수상한다.
1948년 마리니 극장에서 〈계엄령〉 상연,
1949년 12월 에레르토 극장에서 〈정의의 사람들〉을 상연하고
1950년 《반항적 인간》 탈고해 1951년 10월 간행한다.
1952년 혁명관 논쟁으로 사르트르와 절교하고 11월 프랑코 정부의 가입에 항의하여 유네스코에서 탈퇴한다. 오스카 와일드 전집에 〈감옥 속의 예술가〉라는 제목의 서문을 집필한다.
1953년 6월 동베를린 폭동 민중들을 지지했으며 7월 연출가로 복귀한다. 1954년 《여름》 간행을 간행하고
1956년 5월 《전락》 간행,
1957년 3월 《적지와 왕국》을 간행한다. 10월 17일 스톡홀름 왕실아카데미에서 카뮈에게 노벨문학상 수여하기로 결정한 뒤 12월 10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이어 《스웨덴의 연설》을 간행한다.
1959년 2월 앙트완느 극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악령》을 각색해 상연하고 소설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10월 〈악령〉 지방 순회공연을 하고
1960년 1월 4일 파리 동남쪽 몽트로의 빌레블레뱅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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