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은 분이게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고전 문학의 거봉巨峰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1828년 8월 28일에 제정帝政 러시아의 유서 깊은 명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인 야스나야 폴랴나는 톨스토이 애독자에게는 성지聖地와도 같은 곳이며, 현재도 톨스토이를 기리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톨스토이는 15세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는데, 그 동안에 2세 때에 어머니를, 9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후에는 먼 친척인 타치야나와 알렉산드라라는 두 부인에 의해 양육되었다. 타치야나는 ‘사랑하는 일의 행복’과 ‘꾸밈없는 조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톨스토이에게 가르쳐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쳤고, 알렉산드라는 그의 어린 영혼에 신앙심을 심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톨스토이는 고독하고 내성적인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일찍부터 성인 세계의 부정不正을 감지하여 의혹의 눈길을 보내며 인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15세 때에 카잔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2년 동안은 동양어학과에서, 진급 시험에 낙제한 후에는 법학과에서 2년의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자신이 공부에 열중하지 않은 일은 생각지 않고 ‘대학은 학문의 무덤’이라 단정하여 1847년에 자퇴自退하고 말았다. 그 후 농업경영에 전력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상속받게 되어 있던 영지領地인 야스나야 폴랴나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이후 4년간의 농촌 생활은 〈지주地主의 아침〉1856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하지만 너무 일찍 현실의 벽에 부딪쳐 자신의 이상理想이 맥없이 무너져 버렸음을 알고 또한 자신의 행동에서 허위의 냄새를 맡은 톨스토이는, 절망과 자기혐오에 빠져 술과 여자와 도박으로 도피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최초의 위기였다. 1852년에 그는 이러한 생활을 단념하고 군대 복무를 지원하여, 레르몬토프와 인연이 있는 고장인 카프카즈에서 군무軍務에 종사하게 되었다. 평원平原뿐인 중앙 러시아에서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높은 산악으로 둘러싸인 카프카즈의 대자연은 톨스토이를 부활시키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신神의 존재에 다시금 눈을 돌리게 하였다.
1853년에 크림 전쟁이 시작되자 혈기 왕성한 톨스토이는 곧 도나우 군軍에의 전속을 지원하여, 1854년 11월부터 이듬해 8월에 걸친 유명한 세바스토폴리 포위전包圍戰에 참가, 성城을 지키는 데 따르는 온갖 괴로움과 전투의 처절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죽음과 대결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계시啓示에 의해 자기 생애의 목적을 뚜렷이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에 의한 온 인류의 합일合一이라는 꿈이었지만, 시기는 아직 무르익어 있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의 수년 동안은 세바스토폴리 전투의 용사로서 또 신진 작가로서 두 도시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몇 차례의 외국 여행도 즐겼지만, 그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느꼈고 지주地主로서 거기에 정착하여 새로운 생활을 개척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의 이러한 희망은 34세 때인 1862년에 실현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50년 동안, 몇 차례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결혼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온 영지領地에 틀어박힌 톨스토이는 지주로서의 농촌 생활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도시 지식인들과의 교제를 피하며 영지의 경영과 창작 활동에 전념했다. 그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천분天分을 자각한 때는 카프카즈 시절이며, 당시 그는 처녀작 〈유년시대幼年時代〉를 써서 《현대인》지誌에 익명으로 발표했다.
〈유년시대〉는 그 속편인 〈소년시대〉, 〈청년시대〉와 함께 톨스토이 자전自傳 소설의 3부작을 이루는데, 같은 의미에서 그의 초기의 작품, 이를테면 〈세바스토폴리 이야기〉, 〈지주의 아침〉, 〈카자흐 사람들〉 따위도 이 작가의 내면 생활을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몇 번이나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말하고 문학 이외의 훨씬 중요한 목적을 품고 있음을 암시했으며, 마침내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부정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역시 그는 타고난 작가였다. 펜을 잡는 일이야말로 그의 천직天職이었고 또 실제로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러시아 귀족의 명문名門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일반 사회, 특히 농민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곤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번민했으며, 특권을 가진 귀족 지주는 불우한 일반 대중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농민의 생활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영지에 농민을 위한 학교를 창설하고 교과서까지 스스로 만들어 교육에 진력했으며, 농민 해방 운동에도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 집필 중에 세 아이와 예의 두 친척아주머니를 잃은 톨스토이는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어, ‘예술은 인생의 거울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을 때, 이미 거울의 유희遊戱는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 하여 마침내 예술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도 삶과 죽음의 문제에 해답을 내려주지 못했다. 톨스토이는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그러한 그에게 구원의 손을 뻗쳐 절망으로부터 그를 다시 소생시켜 준 것은, 민중의 소박한 신앙—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살아간다는—이었다.
1870년대 말부터 1880년대에 걸쳐 일어난 톨스토이의 전기轉機는,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레빈, 즉 톨스토이 자신에 의해 일찍부터 예언되었다. 그는 3년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어떻게든 경건한 기독교도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인습因習에 젖은 러시아 정교회라는 벽이 그러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사형 제도와 전쟁을 공공연히 긍정하고 다른 종파에 증오의 눈길을 보내는 러시아 정교회의 실태를, 그의 이성理性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구원받을 길 없는 러시아 정교회와 완전히 손을 끊고 복음서의 연구에 몰두한 톨스토이는, 그 성과를 〈교의신학비판敎義神學批判〉, 〈4복음서의 요약 색인과 번역〉,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요약 복음서〉 등의 종교적 논문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그 집대성集大成이 《나의 신앙》이고, 거기에 이르는 영혼의 고뇌를 기록한 것이 《참회록》이었다. 톨스토이는 철학이나 과학에는 인류를 이끌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모든 인간은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즉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른바 톨스토이이즘의 기본이 되어 있는 것은 ‘산상山上의 수훈垂訓’이며, 그는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맹세해서는 안 된다, 악으로써 악에 대항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사람의 적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 톨스토이는 이를 다섯 가지의 계율五戒律이라 부르고 있다 은 결국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자신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로 요약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진리를 알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고 또 인간의 유일한 이성적 활동은 사랑이라는, 복음서에 의거한 톨스토이의 독자적인 교의敎義는, 전 세계 지식인들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중 ‘악에 대항하지 말라’는 주장은 인도의 간디에 의해 계승되었다.
톨스토이는 문학이나 예술은 무의미하다고 선언하고, 그 전기轉機 이후로 도덕적·종교적인 평론이나 논문의 집필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끊기 어려운 욕구에 이끌리어 소설 쓰는 일을 계속하였다. 자신의 손자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있는 걸 보고 “왜 좀더 유익한 책을 읽지 않고, 그런 쓸모없는 책을 읽느냐”고 말한 톨스토이는, 종교 활동에 유익한 작품을 쓰겠다는 구실로 1886년에는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을, 1889년에는 《크로이체르 소나타》를, 그리고 1899년에는 《부활》을 발표하였다. 그는 역시 본질적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작가였던 것이다.
1882년에 모스크바 시세市勢 조사에 참가해 빈민굴을 시찰하게 된 톨스토이는, 농촌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도 가난한 시민들이 지옥 같은 생활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그 악의 원인이 그것을 허용하고 있는 국가 권력에 있음을 폭로하고 그 악을 조장시키고 있는 특권 계급이나 국가, 교회, 과학, 문명에 공공연히 도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악에 가담하기를 거부하고 금전과 토지의 사유私有를 포기하며, 악의 근원인 국가에 봉사하지 않고 사랑과 근로와 자기 희생적 생활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상을 넓히는 수단으로서 그는 〈바보 이반〉,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계신다〉,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 〈촛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두 노인〉 등의 훌륭한 단편短篇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종교적인 평론을 쓰거나 복음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동안은 아직 참고 있던 부인이나 아이들도, 그가 귀족 지주의 생활양식을 버리고 농민과 같은 생활을 시작하자 그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이전에는 가정적인 사랑으로 《전쟁과 평화》나 《안나 카레니나》 집필을 도와 준 부인 소피아도, 이제는 혐오감을 안겨 줄 뿐이었다. 톨스토이는 고독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야스나야 폴랴나도 그에게는 더 이상 안주安住의 땅일 수 없었다. 부부의 반목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어 갔다.
《부활》에 묘사된 감옥 내의 예배당 장면을 문제 삼은 러시아 정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교회로부터 파문破門을 선고받았을 때, 톨스토이의 노여움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항상 ‘악에 대항하지 말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이당시의 러시아의 악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가장 충실한 사도使徒였던 톨스토이가 러시아 혁명의 가장 강력한 추진자이며 선구자가 된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다. 가정 안에서는 고립되고 정부로부터는 위험인물로 백안시당하게 된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버리고 혼자가 되는 데서 최후의 해결책을 구하였다. 그는 1910년 10월 29일 아침, “생애의 마지막 며칠 동안을 고독과 정적 속에서 지내고 싶다”는 글이 쓰인 쪽지를 남기고 몰래 집을 나와 방랑길에 올랐다. 가출家出의 비밀을 알고 있던 사람은, 가족 중의 유일한 이해자理解者였던 장녀 알렉산드라와 친구인 의사뿐이었다.
이윽고 톨스토이가 랴잔 — 우랄선線의 조그마한 간이역인 한랭한 아스타포보 역에서 폐렴으로 쓰러졌다는 뉴스가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1901년에도 며칠 동안 가출했던 적이 있는 톨스토이는, 이리하여 마침내 그 처절한 바람을 이룬 것이다. 며칠 후에 질환이 급변하여 그는 마침내 불귀不歸의 객容이 되었다. “지상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있다, 그런데 왜 당신들은 나 한 사람의 일에만 구애되는가?”라고 불만을 나타내고, “진리를…… 나는 정말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라고 한 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910년 11월 7일 신력新曆으로는 11월 20일의 일이다.
그의 유체遺體는 82년의 생애 대부분을 보낸 회상의 땅인 야스나야 폴랴나의 조용한 숲 속에 장방형으로 마련된, 묘비도 없는 무덤 속에 조용히 잠들어 있다.
톨스토이의 생활 원칙은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이며, 원시적이며 간소한 생활이야말로 최상의 것이라 하여, 도시 문명과 결부되는 모든 것을 배척하였다. 톨스토이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자연인自然人’의 생활이며, 그가 동경한 것은 어머니인 대지大地에 직결되는 생활이었다.
이 신조信條는 그의 생활뿐만 아니라 예술에도 통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에 의하면 진정한 예술은, 첫째 인간의 생활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예술처럼 미美나 향락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감정에 의거한 것이어야 하며, 셋째 하나의 국민이나 하나의 계급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일반 대중에게도 이해되는 보편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 표현과 형식이 간소하고 단순 명료해야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에 수록된 네 편의 단편은 그 조건을 완전히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고전 문학은 일반적으로 인생을 위한 문학, 교훈을 가진 문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훈적인 경향은 특히 톨스토이 문학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경향을 역겨워할 사람도 있겠지만, 이는 어쨌든 톨스토이 자신이 수십 년 동안의 정신적 고뇌 끝에 체득한 사랑의 복음이자 톨스토이 문학의 정수精髓이기도 하므로, 그 길이의 짧음에 관계없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19세기말의 톨스토이만큼 온 세계의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작가는 없으며,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신화적인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광활한 러시아 대지의 아들에 걸맞게 반세기 이상이나 러시아 국민의 정신 생활의 중심이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지구상의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점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확실히 그는 지금도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여러분은 왜 나를 스승이라 부르는가? 나는 스승이 아니다. 죄罪에 있어서나 부활復活에 있어서나 나는 여러분의 형제다.’
옮긴이
1828년
8월 28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아들로 출생.
1830년
어머니 마리아 사망.
1836년
푸슈킨의 시 〈바다에〉 및 〈나폴레옹〉을 낭독하여 아버지를 놀라게 함.
1837년
아버지 니콜라이 뇌일혈로 급사, 이후 고모 댁에서 자람.
1838년
5월 25일 조모 베라게야 사망.
1840년
현존하는 최초의 시 〈친절한 고모님에게〉 씀.
1841년
고모 사망. 카잔으로 이사.
1844년
카잔 대학 입학. 동양어학과에서 아랍어와 터키어 전공.
1845년
동양어학과에서 법과로 전과. 이 무렵부터 철학적 명상에 잠김.
1847년
괴테, 루소, 고골리 등의 저서 탐독. 대학 중퇴, 고향에서 농장을 경영.
1849년
농민 자제를 위한 학교를 세움. 툴라 귀족회에 취직.
1850년
모스크바 생활의 자전적 〈각서〉를 쓰기 시작했으나 미완으로 그침.
1851년
〈유년시대〉를 구상.
1852년
카프카즈 포병대에 입대. 〈유년시대〉를 집필하여 《현대인》지誌에 익명으로 발표. 단편 〈습격〉을 씀.
1853년
크림 전쟁 발발. 각지 전전. 단편 〈크리스마스의 밤〉을 탈고. 〈소년시대〉를 쓰기 시작.
1854년
〈소년시대〉를 《세바스토폴리》에 전재.
1855년
〈당구 기록원의 수기〉, 〈산림 벌채〉, 〈1854년 12월의 세바스토폴리〉, 〈1855년 5월의 세바스토폴리〉를 씀.
1856년
11월에 제대. 〈1855년 8월의 세바스토폴리〉, 〈눈보라〉, 〈두 경기병輕騎兵〉, 〈지주地主의 아침〉, 〈진중 해후陣中邂逅〉를 씀.
1857년
1월 서유럽 여행, 7월 귀국. 농업에 종사. 〈류세 른〉, 〈아리벨리트〉, 〈청년시대〉 발표.
1858년
피아니스트 에르모르체 주재의 음악회 설립에 열중.
1859년
〈세 죽음〉, 〈결혼의 행복〉을 발표.
1860년
교육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음. 7월 재차 외국 여행. 맏형 니콜라이 사망.
1861년
농노해방령 선포. 4월 귀국. 야스나야 폴랴나 학교를 설립하고, 기관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 투르게네프와 절교.
1862년
시의侍醫의 둘째딸 소피아 안드레예프나와 결혼. 〈카자흐 사람들〉, 〈꿈〉, 〈목가〉, 〈폴리쿠시카〉를 발표.
1863년
장남 세르게이 출생, 〈12월 당원〉 쓰기 시작. 《전쟁과 평화》 구상. 〈호르스트메리〉, 〈진보와 교육의 정의〉를 발표.
1864년
장녀 타치야나 출생. 《전쟁과 평화》 〈당시 제목은 1850년〉을 쓰기 시작.
1865년
《전쟁과 평화》 일부를 〈러시아 통보〉에 발표.
1866년
차남 일리야 출생. 《전쟁과 평화》 제2권 탈고.
1867년
《전쟁과 평화》 전 3권 완결.
1869년
3남 레프 탄생. 쇼펜하워와 칸트에 심취. 《전쟁과 평화》 전 4권 완결.
1870년
그리스어 연구, 그리스 고전 탐독.
1872년
〈카프카즈의 포로〉, 〈표트르 1세〉 발표.
1873년
《안나 카레니나》를 쓰기 시작. 《톨스토이 저작집》18권 간행.
1874년
〈국민교육론〉 발표.
1875년
《안나 카레니나》를 《러시아 통보》에 연재하기 시작. 《초등교과서》 제 1~4권 간행.
1877년
《안나 카레니나》를 탈고, 간행. 《참회록》 집필.
1878년
〈최초의 기억〉, 《안나 카레니나》 재판 간행.
1879년
〈12월 당원〉 미완성으로 끝남. 《참회록》 첫 부분 발표하여 러시아 내에서는 발행이 금지되었으나 계속 집필.
1880년
〈교의신학비판〉 간행.
1881년
알렉산더 2세 피살. 도스토예프스키 사망.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요약복음서〉 간행.
1882년
모스크바 시세 조사市勢調査에 참가하여 빈민 생활을 보고 괴로워함. 《참회록》 완성하여 〈러시아 사상〉에 발표. 그러나 발행 금지됨.
1884년
〈나의 종교〉를 발표했으나 발행 금지됨. 젊을 때부터 좋아하던 사냥을 그만둠.
1885년
헨리 조지의 〈토지 국유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사유 재산을 부정함으로써 아내와 의견 대립. 그 결과로 모든 저작권을 아내에게 양도함.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쓰기 시작. 아내의 힘으로 《톨스토이 저작집》 12권 간행.
1886년
《인생론》 쓰기 시작.
1887년
〈어둠의 힘〉 저작권을 버리고 3월부터 육식 끊음.《인생론》을 발간했으나 발행 금지됨. 음주반대 동 맹 운동을 일으킴.
1888년
담배를 끊음.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원서를 제출했으나 당국으로부터 거절당함.
1889년
논문 〈1월 12일의 기념제紀念祭〉 씀. 《예술이란 무엇인가》 쓰기 시작. 《크로이체르 소나타》, 《악령》, 〈각성할 때다〉, 〈신을 섬겨야 하는가 혹은 황금을 섬겨야 하는가〉, 〈손의 노동과 지적知的 노동〉 등을 발표함.
1891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 걸쳐 기근이 일어나자 농민 구제를 위해 활약함.
1893년
〈무위無爲〉를 〈러시아 통보〉에 발표. 〈종교와 국가〉 집필. 〈노자老子〉의 번역에 몰두함.
1894년
모스크바 심리학회의 명예 회원으로 뽑힘. 〈주인과 하인〉 쓰기 시작.
1896년
〈그리스도의 가르침〉, 〈복음서는 어떻게 읽는가〉, 〈현대의 사회 조직에 대하여〉, 《예술이란 무엇인가》 등을 쓰기 시작.
1897년
《예술이란 무엇인가》 출판. 〈헨리 조지의 사상〉, 〈국가와의 관계〉 등을 씀.
1898년
두호보르 교도를 돕기 위한 자금 마련 방편으로 《부활》을 완성하기로 결심.
1899년
3월 《부활》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어 작가적 정열을 증명.
1900년
1월 아카데미 예술회원에 뽑힘.
1901년
그리스 정교正敎에서 파문됨. 〈파문 명령에 대한 종무원宗務院에의 회답〉을 쓰기 시작.
1904년
전쟁반대론 〈반성하라〉, 〈유년 시절의 추억〉 탈고.《해리슨과 무저항》, 《과연 그러지 않으면 안되는가》 출판.
1905년
제1차 혁명의 발발로 국민의 폭동에 정부의 탄압이 가해지자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몹시 고민함.
1906년
〈인생 독본〉, 〈셰익스피어론〉을 〈러시아의 말〉에 게재.
1909년
탄생 80주년 기념 톨스토이 박람회가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열림.
1910년
단편 〈모르는 사이에〉, 〈마을의 사흘 동안〉, 희곡 〈모든 것의 근원〉 씀. 10월 28일 새벽, 아내에게 마지막 글을 써놓고 집을 나가 도중에서 사형을 논한 〈효과있는 수단〉을 집필. 10월 31일 여행 중 병이 들어 랴잔―우랄선線 중간의 조그만 시골 역 아스타포보에서 내림. 11월 3일 최후의 감상을 일기에 씀. 11월 7일 오전 6시 5분 역장 집에서 눈을 감음. 11월 9일 야스나야 폴랴나에 묻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