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는 분에게
카프카는 1883년 7월 3일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며, 1924년 6월 3일 비인 교외 키를링 요양소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생애는 외면상으로는 극히 평범한 일생이었다. 유태계 상인 헤르만과 그의 부인 율리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독일계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프라하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하였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 관리로 취직하여, 1922년 폐결핵 발병으로 퇴직할 때까지 근무하였다.
그는 세 차례 약혼하고서 모두 파혼했는데, 그중 두 차례는(1914, 1917) 펠리체 바우어와였고, 다른 한 번은(1919) 율리에 보리체크와였다. 다른 여인과의 관계, 이를테면 밀레나 예젠스카와의 교제(1920 ~ 22), 도라 디아만트와의 행복했던 결합(1923 ~ 24) 등 두세 연애 사건을 제외하면 외면상 아무런 파란이 없는 매우 평범한 일생이었다.
그러나 내면으로는 극히 불행한 고뇌의 41년이었다. 그의 고뇌는 탄생과 동시에 시작된다. 그는 그의 작품 《시골 의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커다란 상처를 지니고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는 유태인으로 태어났으나, 이른바 민족으로서의 강인한 존재를 의연히 이어온 동방 유태인, 즉 전통 유태인이 아닌 유럽화한 서방 유태인에 속했다. 그러나 유태인으로 태어났으니 기독교 세계에는 영원히 속할 수 없었다. 그는 독일어 사용자로서 체코슬로바키아인은 아니었고, 독일어를 사용했다 해서 보헤미아계 독일인도 아니었으며, 보헤미아 태생이라 해서 오스트리아에 속하지도 않았다. 한편 그는 노동자재해보험국의 관리였으니 일반 서민 계급은 아니었으며, 공장주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니 노동자 계급도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작가로 자처했으니 철저한 관리도 아니었고, 자신의 힘을 아버지가 관리하는 가정에 쏟았으니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작가도 아니었다.
그는 많은 세계에 조금씩 속하면서 그 어느 것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태어나면서부터의 ‘이방인’이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숙명적인 탄생이었으며, 그는 일생 동안 이 상처에 시달렸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한 세계에 소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세계에도 소속하지 않는 것은 존재가 아니다. ‘세계’라고 하는 좌표에 소속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비로소 존재는 수치를 갖는다. 카프카의 경우에는, 어느 세계에도 소속할 수 없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즉 존재를 상실하고 있는 원죄(原罪)를 걸머지고 태어났다. 그의 전생애의 고뇌와 노력은, 어떻게 하면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세계에 소속할 것인가, 즉 어떻게 하면 존재의 수치를 얻을 것인가 하는 점에 쏠려 있었다.
현대사회는 휴머니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인간성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내걸고서 출발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비정상적인 발달로 인해 수단이 목적으로부터 독립하여 거꾸로 목적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즉 기술은 경제를, 경제는 인간을 지배하게 되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사회생활의 상도(常道)가 되었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취를 감추게 되고, 대중은 기계문명의 충실한 로봇으로 전락하였다. 현대문화와 전통문화 사이에는 단절이 생기고, 정신적인 지주를 잃은 현대인은 공간적·시간적으로 고립하게 되었다.
한편 기계의 부품이 될 수 없는 개인은 대중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현대사회의 법을 알지 못하는 개인은 영원한 이방인으로서 이 세계에 소속할 수 없는 운명을 지닌다. 현대사회의 법은 인간이 자기 자신의 본래성을 지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그의 경제적인 방대한 기구는 인간을 철저하게 기능화하고 추상화하며 비인간화하였다. 즉 인간의 소외화 과정이 진행된 것이다. 인간의 본래성은 존재할 수 없게 되고, 존재하는 것은 오직 사회의 메커니즘이 명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직업인간뿐이다.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철저하게 직업적인 기능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카프카의 표현세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W. 엠리히도 지적하고 있듯이, 인간 존재 그 자체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진실과 허위, 죄와 무죄, 자유와 속박, 존재와 비존재, 신념과 회의, 지(知)와 무지, 현세성과 내세성 등 여러 대립의 부단한 긴장 속에 놓여 있는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이마주(image)와 정신적인 언어 속에 형상화되어 있다.
이 이마주와 언어 역시 이처럼 인간 모순의 동시(同時) 존재를 충실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반영하려면, 필연적으로 역설(逆說)의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그러한 서술 형식 그 자체, 즉 이마주가 설정됨과 동시에 폐기되고 해석이 성립됨과 동시에 부정되는 그러한 서술 방법 그 자체가 곧 인간 존재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이 말은 작품의 미세한 부분과 똑같이 작품 전체가 인간의 정신적인 본질 구조의 이마주 형식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서술 형식 그 자체가 상징이 되는 것을 뜻한다.
카프카의 소설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 가능하고 완결이나 본래적인 종말을 갖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소설은 인간 개개인의 어떤 문제를 어느 특정한 방법으로 형태화시켜 결론으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형을 창조하며, 그 모형은 또한 본질상 완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프카 문학은 이와 같이 단편적(斷片的)이고 미완적(未完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 있어서는 어떠한 이마주, 어떠한 사상도 그 자체를 위하여 묘사되는 일은 없고, 다만 기능적인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기능성을 지닌 카프카의 문학을, 어떤 특정한 역사적·이데올로기적 혹은 심리적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전제(前提)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오직 인간 존재의 모형으로서, 형식 그 자체의 면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심판》의 원 제목은 Der Prozeβ로서 ‘소송(訴訟)’으로 옮김이 타당하겠으나, 내용으로 볼 때 단순한 법률적 의미 이상의 것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심판》으로 번역하였음을 밝혀둔다.
작품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책 뒤편의 〈작품론〉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텍스트로는 막스 브로트판을 사용했다.
옮긴이
1883년
7월 3일, 상인 헤르만(Hermann)과 뢰비(Löwy) 가문 출신 율리에(Julie)의 아들로 프라하에서 태어남. 누이동생 엘리(Elli)는 1889년생, 발리(Valli)는 1890년생, 오틀라(Ottla)는 1892년생.
1889년~1893년
플라이쉬마르크트(Fleischmarkt) 초등학교에 다님.
1893년~1901년
알트쉬타트(Altst둪ter) 독일어 국립고등학교에 다님. 루돌프 일로비(Rudolf Illowy)와 오스카르 폴라크(Oskar Polak)와 교제함. 첼트너가(街)에 거주.
1901년~1906년
프라하의 독일계 대학에서 수학. 독문학(2학기)과 법률학 전공.
1902년
리보호와 트리쉬에서 방학을 보냄. 막스 브로트(Max Brod)와 처음 알게 됨. 프란츠 브렌타노(Franz Brentano)의 강의를 듣고, ‘루브르 서클’에 다님.
1904년~1905년
《어떤 투쟁의 기록》 집필. 오스카르 바움(Oskar Baum), 막스 브로트, 펠릭스 벨치(Felix Weltsch)와 규칙적으로 회합. 1905년과 1906년 여름방학은 추크만텔에서 보냄.
1906년
법학박사 학위 받음. 10월부터 1년간 법률 실습.
1907년
《시골에서의 혼례준비》 집필. 10월 일반 보험회사에 입사. 니클라스가(街)로 이사.
1908년
7월부터 1922년 7월 은퇴할 때까지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근무함. 잡지 《히페리온(Hyperion)》에 8편의 산문을 처음으로 발표.
1909년
막스와 오토 브로트와 리봐에서 휴가를 보냄. ‘믈라디치 클럽’에 참여.
1910년
일기를 쓰기 시작. 유태인 극단원과 사귐. ‘판타 서클’ 방문.
1911년
프리틀란트와 라이헨베르크로 공무 여행. 막스 브로트와 함께 북부 이탈리아의 바닷가에서 휴가를 보냄. 에를렌바흐 요양소로 감. 유태인 극단과 극단원 이차크 뢰비(Jizchak Löwy)를 알게 됨.
1912년
연두에 〈실종자〉를 구상함. 7월, 브로트와 바이마르로, 이어서 융보른으로 여행함. 8월에는 첫번째 책 《관찰(Betrachtung)》을 편집하여 12월에 출판.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와 처음 만남. 9월, 《선고(Das Urteil)》 집필.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실종자(Der Verschollene)》 7장까지 완성. 10월, 펠리체 바우어와 서신 왕래 시작. 11월과 12월, 《변신(Die Verwandlung)》 집필. 12월, 프라하에서 최초의 공개 낭독(《선고》).
1913년
부활제에 베를린으로 펠리체를 처음으로 방문. 4월, 트로야에서 원예에 종사. 5월, 베를린 재차 방문. 《화부(Der Heizer)》 출판됨. 9월, 비인, 베니스, 리봐로 감. 스위스 여성과 친교를 맺음.
1914년
베를린에서 부활제를 맞이함. 6월, 펠리체 바우어와 약혼. 7월, 약혼과 파혼. 발트해로 여행. 8월, 빌렉가(街)에 자신의 방을 얻음. 《심판(Der Prozeβ)》의 집필을 시작함. 10월, 《유형지에서(In der Strafkolonie)》 완성. 《실종자》의 마지막 장 완성됨. 그레테 블로흐(Grete Bloch)와 사귐.
1915년
1월, 펠리체 바우어와 다시 만남. 3월, 랑게가(街)에 방을 얻음. 헝가리 여행. 칼 슈테른하임(Carl Sternheim)이 카프카에게 폰타네상(Der Fontane-Preis)을 물려줌. 11월, 《변신》 출판됨.
1916년
7월, 마리엔바트에서 펠리체 바우어와 함께 생활함. 9월, 《선고》 출판됨. 11월, 뮌헨에서 두번째 공개 낭독(《유형지에서》). 알히미스트가(街)에 방을 얻음. 단편집 《시골 의사(Landarzt Erzählungen)》 집필.
1917년
3월, 쇤보른(Schönborn)궁으로 방을 옮김. 7월, 펠리체 바우어와 두번째 약혼. 9월, 폐결핵 확인됨. 취라우의 누이동생 오틀라에게로 옮겨감. 12월, 약혼 파혼.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잠언집 집필.
1918년
취라우에 체재. 여름, 프라하와 룸부르크에 체재. 9월, 취라우로 돌아감. 11월부터 슐레지엔에서 지냄. 율리에 보리체크(Julie Wohryzek)를 알게 됨.
1919년
슐레지엔에 체재. 봄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감. 5월, 《유형지에서》 출판. 율리에 보리체크와 약혼. 가을, 단편집 《시골 의사》 출판됨. 11월, 슐레지엔에 체재. 《아버님께 드리는 편지(Brief an den Vater)》 집필.
1920년
《보유 Er― 계열》 집필. 구스타프 야노우치(Gustav Janouch)와 알게 됨. 4월부터 메란에 체재. 밀레나 예젠스카(Milena Jesenska)와 서신 교환. 비인으로 감. 율리에 보리체크와의 약혼 파혼. 여름과 가을을 프라하에서 지냄. 《포세이돈(Poseidon)》 《밤에(Nachts)》 《법의 문제(Zur Frage der Gesetze)》 《팽이(Der Kreisel)》 등 단편 집필. 12월부터 마틀리아리, 타트라에서 지냄. 로베르트 클로프슈톡크(Robert Klopstock)와의 친교 시작됨.
1921년
마틀리아리에 체재. 가을에 다시 프라하로 돌아옴. 《최초의 고민(Erstes Leid)》 집필.
1922년
2월, 슈핀델뮐레, 이어서 프라하에서 지냄. 6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플라나에 사는 누이동생 오틀라 집에서 지냄. 1월부터 9월까지 《성(Das Schloβ)》을 집필. 봄에 《단식수도자(Ein Hungerkünstler)》, 여름에 《어떤 개의 탐구(Forschungen eines Hundes)》 집필.
1923년
7월, 발트해 연안의 뮈리츠로 감. 도라 디아만트(Dora Diamant)를 알게 됨. 슐레지엔에 체재. 9월부터 베를린에 거주. 10월, 《작은 여인(Eine kleine)》, 겨울에 《건설(Der Bau)》 집필.
1924년
3월, 프라하로 감. 《가수 요제피네(Josefine, die Sängerin)》 집필. 4월 초에 프라하를 출발, 비인 교외 키를링 요양소로 감(도라 디아만트와 로베르트 클로프슈톡크 동행). 6월 3일, 사망함. 6월 11일, 프라하에 묻힘. 여름에 네 개의 단편을 모은 단편집 《단식수도자》 출판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