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정신사의 복원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을 펴내며
한국 근현대 문학은 100여 년에 걸쳐 시간의 지층을 두껍게 쌓아왔다. 이 퇴적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화 되면서도, ‘현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세기가 바뀌면서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재를 보다 냉철하게 평가하며 미래의 전망을 수립해야될 전환기를 맞고 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바로 21세기의 문학적 진로 모색을 위한 텃밭 고르기일뿐 결코 과거로의 문학적 회귀를 위함은 아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은 ‘근대성의 충격’에 대응했던 ‘민족정신의 힘’을 증언하고 있다.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에서 20세기는 광학적인 속도감으로 전통사회가 해체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화적 격변과 전통적 가치체계의 변동양상을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은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민족 정신사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망각된 것들을 애써 소환하는 힘겨운 작업을 자청하면서 출발했다. 따라서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그간 서구적 가치의 잣대로 외면 당한 채 매몰된 문인들과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다시 복원시켰다. 이를 통해 언어 예술로서 문학이 민족 정신의 응결체이며, ‘정신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민족사의 왜곡상을 성찰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편집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째, 문학의 개념을 민족 정신사의 총체적 반영으로 확대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근현대 문학은 서구 기교주의와 출판상업주의의 영향으로 그 개념이 점점 왜소화되어 왔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기존의 협의의 문학 개념에 따른 접근법을 과감히 탈피하여 정치·경제·사상까지 포괄함으로써 ‘20세기 문학·사상선집'의 형태로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시·소설·희곡·평론뿐 아니라, 수필·사상·기행문·실록 수기, 역사·담론·정치평론·아동문학·시나리오·가요·유행가까지 포함시켰다.
둘째, 소설·시 등 특정 장르 중심으로 편찬해 왔던 기존의 ‘문학전집’ 편찬 관성을 과감히 탈피하여 작가 중심의 편집형태를 취했다. 작가별 고유 번호를 부여하여 해당 작가가 쓴 모든 장르의 글을 게재하며, 한 권 분량의 출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별 시리즈 출판이 가능케 하였다. 특히 자료적 가치를 살려 그간 문학사에서 누락된 작품 및 최신 발굴작 등을 대폭 포함시킬 수 있도록 고려했다. 기획 과정에서 그간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문인들을 다수 포함시켰으며, 지금까지 배제되어 왔던 문인들에 대해서는 전집발간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이를 통해 20세기 모든 문학을 포괄하는 총자료집이 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셋째, 학계의 대표적인 문학 연구자들을 책임 편집자로 위촉하여 이들 책임편집자가 작가·작품론을집필함으로써 비평판 문학선집의 신뢰성을 확보했다. 전문 문학연구자의 작가·작품론에는개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한국 문학연구의 성과가 집약돼 있다. 세심하게 집필된 비평문은 작가의 생애·작품세계·문학사적 의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부록으로 검증된 작가연보·작품연구·기존 연구 목록까지 포함하고 있다.
넷째, 한국 문학연구에 혼선을 초래했던 판본 미확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작품의 경우 현대어로 출판되는 과정에서 작품의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이번 기획은 작품의 원본에 입각한 판본 확정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근현대 문학 정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신뢰성 있는 선집 출간을 위해 작품 선정 및 판본 확정은 해당 작가에 대한 연구 실적이 풍부한 권위있는 책임편집자가 맡고, 원본 입력 및 교열은 박사 과정급 이상의 전문연구자가 맡아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하였다. 또한 원문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엄밀한 대조 교열작업에서 맞춤법 이외에는 고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번 한국문학 출판으로 일반 독자들과 연구자들은 정확한 판본에 입각한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근대 개화기부터 현대까지 전체를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문학 전집 출간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권수의 제한 없이 장기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출간될 것이며, 이러한 출판 취지에 걸맞는 문인들이 새롭게 발굴되면 계속적으로 출판에 반영할 것이다. 작고 문인들의 유족과 문학 연구자들의 도움과 제보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 편집위원회 임헌영·오창은
1892년
(1세)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940번지 돌고지에서 이종원(42세)과 삼취三聚부인(23세) 사이에서 전주 이씨 문중 5대 장손으로 태어나다. 생후 2개월만에 풍병風病으로 기절하다. 그 후에도 5,6세가 넘도록 병약하여 잔병을 많이 치르다.
1894년
(3세) 가세가 빈한하여 2년간 세 번씩이나 이사를 하는 등 극도의 곤궁한 생활을 하다. 아명을 보배스런 거울이란 뜻의 보경寶鏡으로 하다.
1896년
(5세) 국문을 비롯하여 한글과 천자를 깨치다. 외조모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전》 등을 읽어주고 상급을 받다.
1902년
(11세) 아버지 이종원(52세) 콜레라로 사망하다. 같은 해 어머니 김씨도 같은 병으로 사망(33세)하여 일시에 삼 남매가 고아가 되다.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사당에 불을 놓아 홍패, 책, 위패 등을 태우려 하다. 큰 누이동생은 할아버지 이건규에게 맡기고, 젖먹이는 남의 집 민며느리로 들이는 등 세상의 무정함을 맛보기 시작하다.
1903년
(12세) 동학 대 접주 승이달承履達을 만나 동학교도가 되다. 동학에 입도하여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며 동경과 서울로부터 오는 문서를 베껴 배포하는 서기의 일을 보다.
1904년
(13세) 일본의 동학탄압에 따라 향리를 떠나 진남포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오다. 부모의 유산인 세목 두 필, 명주 세 필, 광목 한 필을 일흔 냥에 팔아 그것을 노자로 쓰다.
1905년
(14세) 궁장중영弓場重榮의 《일어독학》을 암송하여 일진회에서 세운 소공동학교의 일어 선생이 되다. 일진회(천도교)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하다.
1906년
(15세) 벽초 홍명희(19세)와 한 하숙에 동거하며 교분을 맺다.
1907년
(16세) 도산 안창호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 동경에서 행한 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받다. 호암 문일평(20세) 등과 교유하다.
1908년
(17세) 명치학원의 급우인 산기준부山崎俊夫의 권으로 톨스토이에 심취하다. 홍명희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19세)을 알게 되다. 같은 홍명희의 소개로 서울에서 정인보를 만나다.
1909년
(18세) 〈국목전독보國木田獨步〉〈하목수석夏木漱石〉〈목하상강木下尙江〉 등의 작품을 애독하는 한편 홍명희의 영향을 받아 바이런의 〈카인〉〈해적〉〈돈판〉 등을 읽음으로써 당시에 풍미했던 자연주의 문학에 영향을 받다.
1910년
(19세) 조부 위독하여 급히 귀국하다. 오산학교 교주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오산학교 교원이 되다.
1913년
(22세) 오산학교를 사직하고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한만 국경을 넘다. 상해에서 홍명희, 문일평 등과 다시 만나 칩거하다. 단재 신채호를 상해에서 만나다.
1914년
(23세)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해삼위를 거쳐 러시아 대륙횡단 열차로 미국으로 출발하다. 여비가 없어 바이칼 호반 근처인 러시아 치타에 머물면서 미국으로부터 여비 오기를 기다리다. 그러나 구주대전이 발발함으로 하여 미국 길이 막히다. 다시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
1915년
(24세) 인촌 김성수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다. 와세다 대학 고등 예과에 편입하다.
1916년
(25세) 《매일신보》 신년호부터 연재할 소설을 청탁 받다. 구고 중 〈영채〉에 관한 것을 정리하여 《무정》이라 제하여 연재 준비를 하다.
1917년
(26세) 한국 신문학사에 획을 그은 《무정》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다. 유학생 모임에서 운명의 여인 허영숙을 알게되다. 6월 14일 《무정》 연재를 마치다(총 126회).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다.
1918년
(27세) 장편 《무정》 광익서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하다. 허영숙과 북경으로 애정 도피 행각을 벌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듣고 급히 귀국하여 도일하다.
1919년
(28세) 〈조선청년독립선언서〉(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이를 영역하여 해외에 배포하는 임무를 맡고 상해로 탈출하다. 도산 안창호 미국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다. 안도산의 사상에 매료되다.
1921년
(30세)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다. 허영숙 위험을 무릅쓰고 이광수를 찾아 상해로 오다. 임시 정부에서는 여론이 비등하다. 이광수 허영숙으로 인해 물의가 빚어지자 눈물을 머금고 허영숙을 귀국시키다. 이광수도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천진, 봉천을 거쳐 밤차로 압록강을 건너다.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연행되었다가, 서울로 송치, 불기소로 석방되다. 변절자로 지탄받기 시작하다. 허영숙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리다. 삼종제 이학수 불문으로 출가하다. 〈민족개조론〉을 집필하다.
1922년
(31세) 〈수양동우회〉를 발기하다.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자 개벽사가 폭행을 당하는 등 비난이 거세지다.
1923년
(32세) 송진우의 추천으로 단편 〈가실嘉實〉을 익명으로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김성수와 송진우의 권고로 《동아일보》 객원이 되다.
1924년
(33세) 《재생》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1925년
(34세) 백인제 박사의 집도로 척추카리에스 수술을 받아 한쪽 갈빗대를 도려내다.
1926년
(35세) 《마의태자》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다.
1928년
(37세) 《단종애사》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다시 백인제 박사의 집도로 좌편 신장을 도려내는 대수술을 받다.
1930년
(39세) 《군상》 3부작 중 《혁명가의 아내》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이어서 《사랑의 다각형》 《삼봉이네 집》을 계속 연재하다.
1931년
(40세) 《이순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1932년
(41세) 《흙》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다.
1933년
(42세) 《흙》 연재를 마치다. 《동아일보》를 사임하고 《조선일보》로 자리를 옮기다. 《유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34년
(43세)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사임하다.
1935년
(44세) 《그 여자의 일생》《이차돈의 사》를 계속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박정호를 문하생으로 삼아 자하문 밖 산장에 같이 기거하며 진정한 교분을 맺다.
1936년
(45세) 《애욕의 피안》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37년
(46세) 《조선일보》에 《그의 자서전》 끝내고 이어서 〈공민왕〉 연재 시작하다. 종로경찰서에 노작인 법화경 번역 원고를 압수 당하다. 동우회사건 피의자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다. 신병이 재발하여 병 보석으로 경의의전 병원에 입원하다. 도산 안창호 사경으로 병 보석 받아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하다.
1938년
(47세) 안도산 서거하다. 단편 〈무명〉과 《사랑》 집필 시작하다.
1939년
(48세) 《사랑》 하권 집필을 끝내다. 《세조대왕》 집필을 시작하다. 〈꿈〉을 집필하다.
1940년
(49세) 이광수李光洙를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창씨 개명하다.
1941년
(50세) 《원효대사》 집필에 착수하다. 일본군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 일어나다. 이 해 일제의 강요로 각지를 순회하며 학병을 권유하다.
1945년
(54세) 세 자녀와 함께 사릉思陵에서 해방을 맞다. 친일파로 지목되어 사회의 비난의 적이 되다. 허영숙 피신을 권유하다. 이광수 일축하다. 사릉에 칩거하며 독서와 농사로 소일하다.
1946년
(55세) 삼종제 운허당 이학수가 있는 봉선사로 들어가다.
1947년
(56세) 《도산 안창호》 집필 시작하다. 《꿈》(구고) 간행되다.
1948년
(57세) 《돌베개》 간행되다.
1949년
(58세) 반민법에 걸려 육당 최남선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다. 아들 영근의 혈서가 주효하여 병 보석으로 출감되다. 《사랑의 동명왕》 탈고하다.
1950년
(59세) 북한 공산군에 의해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다. 공산군의 허위보도에 속아, 딸인 정화가 서대문 형무소에 옷 한 벌과 내의, 약품 등을 차입하였으나 이때는 이미 평양으로 이송된 후임을 나중에 알게 되다. 그동안 생사를 알 수 없었으나, 최근 북한에 있는 이광수의 묘소가 확인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