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0 0 1 17 0 3년전 0

어린이 찬미(외)

한민족 정신사의 복원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을 펴내며 한국 근현대 문학은 100여 년에 걸쳐 시간의 지층을 두껍게 쌓아왔다. 이 퇴적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화 되면서도, ‘현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세기가 바뀌면서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재를 보다 냉철하게 평가하며 미래의 전망을 수립해야될 전환기를 맞고 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바로 21세기의 문학적 진로 모색을 위한 텃밭 고르기일뿐 결코 과거로의 문학적 회귀를 위함은 아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은 ‘근대성의 충격’에 대응했던 ‘민족정신의 힘’을 증언하고 있다.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에서 20세기는 광학적인 속도감으로 전통사회가 해체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화적 ..
한민족 정신사의 복원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을 펴내며

한국 근현대 문학은 100여 년에 걸쳐 시간의 지층을 두껍게 쌓아왔다. 이 퇴적층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화 되면서도, ‘현재’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세기가 바뀌면서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현재를 보다 냉철하게 평가하며 미래의 전망을 수립해야될 전환기를 맞고 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바로 21세기의 문학적 진로 모색을 위한 텃밭 고르기일뿐 결코 과거로의 문학적 회귀를 위함은 아니다.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은 ‘근대성의 충격’에 대응했던 ‘민족정신의 힘’을 증언하고 있다. 한민족 반만년의 역사에서 20세기는 광학적인 속도감으로 전통사회가 해체되었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화적 격변과 전통적 가치체계의 변동양상을 20세기 한국 근현대 문학은 고스란히 증언하고 있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민족 정신사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망각된 것들을 애써 소환하는 힘겨운 작업을 자청하면서 출발했다. 따라서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그간 서구적 가치의 잣대로 외면 당한 채 매몰된 문인들과 작품들을 광범위하게 다시 복원시켰다. 이를 통해 언어 예술로서 문학이 민족 정신의 응결체이며, ‘정신의 위기’로 일컬어지는 민족사의 왜곡상을 성찰할 수 있는 전망대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이러한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은 편집 방향으로 기획되었다.
첫째, 문학의 개념을 민족 정신사의 총체적 반영으로 확대하였다. 지난 1세기 동안 한국 근현대 문학은 서구 기교주의와 출판상업주의의 영향으로 그 개념이 점점 왜소화되어 왔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기존의 협의의 문학 개념에 따른 접근법을 과감히 탈피하여 정치·경제·사상까지 포괄함으로써 ‘20세기 문학·사상선집'의 형태로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시·소설·희곡·평론뿐 아니라, 수필·사상·기행문·실록 수기, 역사·담론·정치평론·아동문학·시나리오·가요·유행가까지 포함시켰다.
둘째, 소설·시 등 특정 장르 중심으로 편찬해 왔던 기존의 ‘문학전집’ 편찬 관성을 과감히 탈피하여 작가 중심의 편집형태를 취했다. 작가별 고유 번호를 부여하여 해당 작가가 쓴 모든 장르의 글을 게재하며, 한 권 분량의 출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별 시리즈 출판이 가능케 하였다. 특히 자료적 가치를 살려 그간 문학사에서 누락된 작품 및 최신 발굴작 등을 대폭 포함시킬 수 있도록 고려했다. 기획 과정에서 그간 한 번도 다뤄지지 않은 문인들을 다수 포함시켰으며, 지금까지 배제되어 왔던 문인들에 대해서는 전집발간을 계속 추진할 것이다. 이를 통해 20세기 모든 문학을 포괄하는 총자료집이 될 수 있도록 기획했다.
셋째, 학계의 대표적인 문학 연구자들을 책임 편집자로 위촉하여 이들 책임편집자가 작가·작품론을집필함으로써 비평판 문학선집의 신뢰성을 확보했다. 전문 문학연구자의 작가·작품론에는개별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한국 문학연구의 성과가 집약돼 있다. 세심하게 집필된 비평문은 작가의 생애·작품세계·문학사적 의의를 포함하고 있으며, 부록으로 검증된 작가연보·작품연구·기존 연구 목록까지 포함하고 있다.
넷째, 한국 문학연구에 혼선을 초래했던 판본 미확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일제 강점기 작품의 경우 현대어로 출판되는 과정에서 작품의 원형이 훼손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이번 기획은 작품의 원본에 입각한 판본 확정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 근현대 문학 정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신뢰성 있는 선집 출간을 위해 작품 선정 및 판본 확정은 해당 작가에 대한 연구 실적이 풍부한 권위있는 책임편집자가 맡고, 원본 입력 및 교열은 박사 과정급 이상의 전문연구자가 맡아 전문성과 책임성을 강화하였다. 또한 원문의 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엄밀한 대조 교열작업에서 맞춤법 이외에는 고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이번 한국문학 출판으로 일반 독자들과 연구자들은 정확한 판본에 입각한 텍스트를 읽을 수 있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은 근대 개화기부터 현대까지 전체를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문학 전집 출간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권수의 제한 없이 장기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출간될 것이며, 이러한 출판 취지에 걸맞는 문인들이 새롭게 발굴되면 계속적으로 출판에 반영할 것이다. 작고 문인들의 유족과 문학 연구자들의 도움과 제보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범우비평판 한국문학 편집위원회 임헌영·오창은
1899년
11월 9일(음력 10. 7), 서울 야주개(현재 당주동)에서 동학東學혁명에 참여한 방경수方慶洙 씨의 장남으로, 미곡상 겸 정미업, 어물전 등을 경영하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본적은 경성부 견리동 118번지다.

1903년
서당에서 천자문 읽기 시작함(7세까지 읽음).

1905년
서대문 부근 보성 소학교 교장 김중환 선생에 의하여 삭발을 당하여 유치반에 입학함.

1907년
종조부의 사업 실패로 사직동 초가집으로 이사하게 됨으로써, 고생 많은 소년 시절이 시작됨.

1908년
대한문 맞은 편 최씨 집을 근거로 어린이 토론 연설회인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이끌어감. 콩나물죽 먹기, 쌀 꾸러다니기, 전당포 심부름, 물긷기 등 어려운 생활이 계속됨.

1909년
매동 보통학교에 입학.

1910년
미동 보통학교로 전학.

1913년
3월 25일, 미동 보통학교 졸업. 인쇄소 연판공이던 조부의 뜻에 따라 선린 상업학교 입학.

1914년
육당의 《소년》 《붉은져고리》 《아이들보이》 《새별》 등 탐독. 선린 상업학교를 중퇴.

1915년
가계를 돕기 위해 총독부 토지 조사국의 사자생寫字生 일을 하면서 유광렬柳光烈 씨와 노무자 합숙소에서 함께 기거.

1916년
천도교당에서 청년회 활동에 참여함.

1917년
(음) 4월 8일, 천도교인 권병덕權秉悳(33인 중 1인)선생의 천거로 동덕 여학교 출신의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셋째 따님 용화溶嬅 여사(1901. 7. 30. 출생)와 결혼. 처가에 기거중 부친 별세(5월 6일).

1918년
3월 22일, 처가에서 장남 운용云容 출생. 장인이 교주로 있는 보성普成 전문 학교에 입학.
7월 7일, 비밀청년결사 ‘청년구락부’를 유광렬柳光列, 이중각李重珏, 이복원李馥遠 제씨와 함께 조직(회원 2백 명 가량).
12월, ‘청년구락부’ 망년회 때 소의 소학교(현 동성중고교 전신)에서 소인극 〈동원령〉 연출,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잡지 《녹성》 창간(창간 동인-마해송, 유광렬, 이범일 씨 등).

1919년
1월 19일 근대적인 문예지인 《창조》보다 10일 앞서 〈경성 청년구락부〉의 기관지 《신청년新靑年》(권두언 한용운 집필)을 유광렬·이중각과 함께 2호(1929. 8.1)까지 편집 간행했는데, 이 잡지의 문학사적 가치와 의의는 근년에 와 거의 절대적임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1921년 이후의 4호부터 6호까지는 같은 청년구락부 회원인 심훈沈熏, 나도향羅稻香, 박영희朴英熙, 최승일崔承一, 황석우黃錫禹, 현진건玄鎭健, 박종화朴鍾和 등이 참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의 낭만파와 프로문학파가 참여한 《장미촌》(1921) 동인, 《백조》(1922) 동인, 《염군사焰群社》(1922) 동인 등 좌우를 막론한 다양한 근대문학도의 온상이 바로 이 《신청년》이었기 때문이다.
3·1기미독립운동 발발. 등사판 지하신문으로서 보성 전문학교 교내 신문인 《조선독립신문》에 3·1운동 사건을 최초로 보도,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1주일간 고문 취조를 받다가 풀려남.

1920년
일엽一葉 김원주金元周 여사의 요청으로 유광렬, 신주리아 등과 함께 〈신여자〉 창간(6월 25일 장녀 영화榮華 태어남). 9월 15일, 《독립신문》 편집, 배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일제 관헌의 요시찰 추적을 피해 일본 유학에 오름. 동경 동양대학 문화 학부의 특별 청강생이 됨. 동경과 서울을 오가며 청년 운동과 소년 운동을 조직 지휘함.
8월 25일, 번역 동시, 〈어린이 노래 : 불켜는 이〉(《개벽》 3호)’에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함(소파의 기록물 중 현재로서는 최초의 자료임). 개벽사 동경 특파원으로 활동함.

1921년
2월 13일, 천도교 청년회 동경지회 조직, 초대 회장이 됨. 2월 하순경부터 3월 중순까지 ‘친일파 민원식 살해 사건’에 연루되어 박달성과 함께 동경에서 구금됨.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 조직(김기전金起田,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5월 22일,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라는 표어를 《동아일보》에 발표.
6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천도교 전국 순회 강연회에 연사로 〈내일을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80여 회에 걸쳐 강연함.
9월, 자작극 〈신생新生의 일日〉을 천도교 대강당에서 연출.

1922년
5월 1일, 천도교 소년회에서 ‘어린이의 날’ 제정, 〈10년 후 조선을 여廬하라〉라는 전단지 배포하며 시가 행진. 5월 19일, 장인인 의암 손병희 선생 순국. 향년 62세.
7월 6일,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개벽사에서 출간. 이 무렵부터 20여 종의 가지가지 필명으로 여러 매체에 동시다발형으로 온갖 형태의 글을 발표함.

1923년
3월 16일, 동경에서 《어린이》지 편집 동인들이 중심이 되어 아동 문제 연구 단체인 ‘색동회’ 발족을 위한 발기회를 갖고 5월 1일 창립시킴. 3월 20일, 《어린이》지 창간(개벽사에서 처음 타블로이드판으로 출간되어 국판 잡지로 발전함).
5월 1일, 천도교당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중심으로 ‘반도 소년회’ ‘불교 소년회’ ‘조선 소년군’과 손잡고 ‘소년운동협회’를 창립하고, 정식으로 ‘어린이날’을 선포, 통합 기념식을 거행함(〈어른에게 드리는 글〉〈어린 동무에게 주는 말〉〈어린이날의 약속〉 등 전단 12만 장을 살포함). 동경 유학 시절인 이 무렵부터 사회주의자 김찬金燦, 조명희趙明熙, 이익상李益相, 김영팔金永八 등과 왕래하고 김기진金基鎭, 박영희朴英熙 등과 교류하며 카프(KAPE) 문학 사상을 소화함.

1924년
5월1일, 제2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천도교 교당에서 가짐. 5월4일, 동대문 밖 상춘원에서 노동소년위안회 및 대원유희를 개최함. 5월 15일, 그의 아동관을 대변하는 수필 〈어린이 찬미〉를 《신여성》 6월호에 발표함.
8월에 전 조선(140개처 소년회) 소년지도자대회를 소집하여 흩어져 있는 단체의 통합을 꾀함. 개벽사의 《어린이》《신여성》《개벽》 등 3대 잡지를 동시에 직접 편집 제작에 진력함.

1925년
1월, 차남 하용夏容 출생.
3월 21일부터 30일까지, 《어린이》지 창간 2주년 기념 행사로 서울·대구·마산·김천·인천 등 전국 5대 도시 소년 대회를 위해 지방을 순회함.
5월, 제3회 어린이날에 〈어린이날 노래〉를 작사하여 부르게 하고 ‘우리의 희망은 어린이’‘앞날의 임자는 어린이’ 등 플래카드를 들고 취주악대를 앞세워 시가 행진, 동화구연대회와 갖가지 여흥 행사를 가짐.
9월 15일, 소파 주도의 ‘조선소년운동협의회’에서 ‘오월회’가 좌파인 정흥교 중심으로 이탈하여 ‘경성소년연맹회’를 결성함. 이 시기를 전후하여 《어린이》 독자란을 통해, 유지영, 윤석중, 서덕출, 이원수, 이정구, 윤복진, 최경화, 최순애, 신고송, 목일신 등 신인을 배출함.

1926년
5월 1일, 순종純宗의 국장으로 인해 어린이날 행사를 중지함.
6·10만세 사건으로 예비 검속 당함.
8월 1일, 민족운동 잡지 《개벽》지가 발행 금지 조치를 당하자(지령 72호), 소파는 대신 대중잡지 《별건곤》지를 창간 발행함. 8월 25일, 《어린이》지 주최로 동화 동요 대회를 개최함.

1927년
2월 16일, ‘어린이와 직업’이란 연재로 처음으로 경성 방송국에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함.
4월 20일, ‘백상규―김명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 차상찬과 함께 1주일간 구금됨.
5월 1일, 정홍교가 대표로 있는 ‘오월회’와 별도로 ‘소년운동협회’ 중심으로 어린이날 기념식을 가짐.
10월 16일, ‘오월회’와 다시 통합 단체로서 ‘조선소년연합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됨. 5월 1일 하던 어린이날을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하기로 결의함.

1928년
3월 20일, ‘조선소년연합회’가 ‘조선소년총동맹’으로 개칭되어 소년운동 방향도 달라짐. 일제의 압력이 우심해지자 단체 활동에서 손을 떼고, 잡지 발행과 강연 등을 통한 어린이 운동에만 전념함.
4월 17일, 차녀 영숙榮淑 태어남.
6월 5일, 단성사에서 어린이날 실황 기록 영화를 상연함.
10월 2일부터 9일까지, 4년간의 기획 준비로 어린이사(개벽사) 주최, 《동아일보》 후원, 색동회 동지들의 주관으로 20여 개국에서 수집한 그림 전시회인 ‘세계 아동예술 전람회’를 개최하고, 개최 기간중 아동들이 동요·무용 등을 발표케 함. 이 무렵을 전후하여 과로 후면 두통약과 냉수 또는 빙수 등으로 고혈압 증세를 달래 왔으나 지병이 악화되어 얼굴이 붓고 핏기가 없어지는 현상이 나타남. 당국으로부터 강연과 구연동화대회 참가 개최를 전면 금지 당함.

1929년
3월 1일, 개벽사에서 월간 《학생學生》을 창간함.

1930년
《어린이》지 발행 부수 10만 부를 돌파(서울 인구 30여만 명, 《동아일보》《조선일보》 발행 부수 5만 부 정도일 때임.

1931년
3월 1일, 개벽사에서 새 잡지 《혜성彗星》을 창간하였으나, 7월 19일 증가되는 개벽사 부채로 경영 책임자인 그의 고통이 과로와 함께 그를 쓰러지게 함.
7월 23일, 신장염 고혈압 증세 악화로 서울대학병원에서 부인과 조재호, 박진 등과 장남 운용이 임종하는 가운데 운명. 천도교 장(삼일장)으로 장례가 수운회관 마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식장이 어린이들의 울음바다로 변함.
8월 20일, 《어린이》지 통권 87호가 소파 선생 특집으로 꾸며짐.
11월, 색동회에서 제4회 동요대회를 가짐.

1931년~1934년
《어린이》지가 이정호, 신영철, 윤석중 주간으로 이어졌으나 122호로 폐간됨.

1936년
7월 23일, 5주기 때 홍제동 화장터에서 5년 묵힌 유골을 망우리 아차산 묘지에 안장함. 색동회 동인 및 측근들인 유광열, 차상찬, 정순철, 마해송, 최영주, 윤석중, 이정호, 그리고 장남 운용 제씨에 의하여 묘석이 건립됨.(‘동심여선童心如仙’이란 오세창 선생의 글씨로 ‘어린이의 동무 소파 방정환지묘’라는 쑥돌 묘석이 세워짐).

1940년
5월 1일, 10주기 때 마해송과 최영주에 의하여 《소파 전집》(500부 한정판)이 박문서관에서 발행됨.

1957년
7월 23일, 선생의 소년 운동을 기리기 위해 새싹회(회장 윤석중)에서 ‘소파상’ 제정.

1962년
8월 25일, 을유문화사에서 《방정환 아동문학 독본》 간행.

1965년
11월 30일, 마해송, 이원수, 이주홍 감수로 《소파 아동문학전집(전5권)》이 삼도사에서 발간됨.

1969년
3월 1일, 을유문화사에서 《소파 수필선》이 간행됨.

1971년
40주기, 7월23일,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옆 녹지대에 ‘소파 방정환상’이 건립됨. 소파 방정환 선생님 동상 건립위원회(대표 조재호)와 색동회 중앙위원 및 전국 어린이들의 뜨거운 정성과 유지들의 도움으로 세워짐(후에 능동 어린이 대공원으로 옮겨짐).

1973년
2월 17일, 색동회 실행위원으로 조풍연(총무), 이원수, 손대업, 이해창, 이석현, 이재철, 이영태, 김수남, 차웅열(감사), 배동익(감사) 등을 선출하고 위원장은 매년 중앙위원이 윤번제로 하기로 함.

1974년
4월 20일, 이원수, 이주홍 감수, 이재철 책임 편집으로 《소파 방정환 전집》 8권이 문천사에서 간행됨.

1978년
10월 20일, 금관 문화훈장을 추서함.

1980년
8월 14일, 건국 포장을 받음.

1983년
5월 5일, 《어린이》지 창간 60주년을 맞아 아동문학평론사(이재철)·아동문예(박종현)의 주선으로 망우리 묘지가 돌계단과 상석 건립 등 정화 수축되고, ‘방정환 선생의 비(비문:이재철 글씨:정주상)’가 건립됨.

1989년
5월 5일, ‘어린이날’ 소파 묘소 참배 제1회 ‘동요 동시 백일장’이 시작됨.

1991년
5월 21일, 아동문학평론사와 아동문학학회 주관으로 ‘방정환 문학상’이 제정되고, 제1회 시상식을 가짐.

1999년
7월 23일,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가 각계에서 거행됨.

2002년
10월 4일, 장남云容 별세, 장손 이학박사 방일수方一銖 씨가 미국 대학 연구원 근무 중 일시 귀국.

㈜유페이퍼 대표 이병훈 | 316-86-00520 | 통신판매 2017-서울강남-00994 서울 강남구 학동로2길19, 2층 (논현동,세일빌딩) 02-577-6002 help@upaper.net 개인정보책임 :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