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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나무 있는 삽화(외)

이 책은 채만식의 작품을 모은 선집이다. 이 책의 작업 과정과 편집의 원칙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작품의 최초 발표지면을 찾아 원문을 확보하였다. 일차적인 판본의 확정은, 따로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의 경우 최초 발표된 원문을 판본으로 선택하였고, 작가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경우에는 단행본에 재수록된 텍스트를 판본으로 선택하였다. 2. 최초 발표 원문의 조사와 확보, 원문의 입력, 원문의 교정과 교열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김희진씨가 맡아서 수고해주었다. 최종적인 원문과의 대조와 확인, 현대어 표기문제, 작품의 주석 작업은 편자가 맡았다. 오래된 자료여서 원문 복사가 불가능한 경우 디지털파일을 확보하여 입력·교정 작업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문을 일일이 확인하여 ..
이 책은 채만식의 작품을 모은 선집이다.
이 책의 작업 과정과 편집의 원칙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작품의 최초 발표지면을 찾아 원문을 확보하였다. 일차적인 판본의 확정은, 따로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의 경우 최초 발표된 원문을 판본으로 선택하였고, 작가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경우에는 단행본에 재수록된 텍스트를 판본으로 선택하였다.
2. 최초 발표 원문의 조사와 확보, 원문의 입력, 원문의 교정과 교열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김희진씨가 맡아서 수고해주었다. 최종적인 원문과의 대조와 확인, 현대어 표기문제, 작품의 주석 작업은 편자가 맡았다. 오래된 자료여서 원문 복사가 불가능한 경우 디지털파일을 확보하여 입력·교정 작업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문을 일일이 확인하여 기존 판본들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3.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현대어 표기에 맞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채만식 특유의 표현이나 사투리 등, 텍스트의 질감과 현장감을 충분히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최대한 원문의 표기를 존중하였다. 특히 대화 부분의 경우는 현대어 표기에 어긋나더라도 가능한 원문 그대로 복원하였다. 작품은 장르별로 구분하여 발표 시기 순으로 배열하였고, 모든 작품의 말미에는 원문으로 삼은 판본을 밝혀두었다.
4. 작품 속 낱말의 뜻풀이에는 국립국어원 편, 《표준국어대사전》(두산동아, 1999)과 임무출 편, 《채만식 어휘사전》(토담, 1997)을 참고하였고, 연보 작성에는 이어령 편, 《한국문학연구사전》(우석, 1990), 《채만식전집》(창작과비평사, 1989)과 국어문학회 편, 《채만식 문학연구》(한국문화사, 1997)를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선배 연구자들의 열정과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02년 (1세)
7월 21일(음력 6월 17일)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에서, 부친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9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나다. 본관은 평강이며 본명은 만식, 호는 백릉白菱이다. 나중에 채옹采翁이라 했으나 잘 사용하지 않았고 필명을 서동산徐東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10년 (9세)
4년제인 임피보통학교에 입학하다. 보통학교에 다니면서도 6, 7세부터 배워오던 한학 공부를 계속하다.

1914년 (13세)
3월 임피보통학교 졸업하다.

1918년 (17세)
상경하여 4년제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20년 (19세)
3학년 재학중 부모의 강권에 의해 4월 21일(음력 3월 3일)에 익산시 함열읍(이전의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에 사는 1년 연상의 신주 은씨 은선흥(당시 20세)과 결혼하다.

1922년 (21세)
3월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도일하여 와세다(早稻田) 대학 예과(3년제)에 입학하여 문학을 전공하다. 이 학교의 축구부에서 센터포드로 활약하다.

1923년 (22세)
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다. 귀향 후 소설집필을 시작하여 최초의 창작소설인〈과도기過度期〉를 탈고하다. 이 시기부터 채만식 문학의 자산이 된 고소설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고전을 탐독하기 시작하다.

1924년 (23세)
와세다 대학으로부터 장기결석과 학비 미납을 이유로 2월 1일자로 제적 처분을 당하다. 경기도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취직하다. 1924년 12월호 《조선문단》에 단편 〈세 길로〉가 이광수의 추천으로 게재되어 문단에 데뷔하다. 장남 무열이 출생하다.

1925년 (24세)
7월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입사하다. 단편 〈불효자식〉이《조선문단》 2권 10호에 다시 추천 게재되다.

1926년 (25세)
10월에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의 소재를 찾아 방황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다양한 문학 장르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다.

1928년 (27세)
차남 계열이 출생하다.

1930년 (29세)
개벽사에 입사하다.

1933년 (32세)
개벽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사에 입사하다.

1934년 (33세)
《신동아》에 발표한 단막희곡 〈인텔리와 빈대떡〉, 단편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으로 작가적 명성을 얻기 시작하다.

1936년 (35세)
1월 조선일보사를 퇴사하고, 이후 작가활동에 전념하다. 금광업을 하던 형 준식이 거주하던 개성(개성부 남산정 956번지)에 머물다가 이듬해 안양으로 이거하다. 개성에 체류하는 동안 단발과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학생 조직 모임에서 강연했다는 이유로 일본 형사에게 잡혀 10여일의 구치를 당하다.

1938년 (37세)
장편소설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을 《조광》에, 단편소설 〈치숙癡叔〉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다.

1939년 (38세)
8월에 학예사에서 《채만식 단편집蔡萬植短篇集》이, 11월에 박문서관에서 장편 《탁류濁流》가 출판되다.

1940년 (39세)
장편 《태평천하太平天下》가 명성사에서 출판되다. 이 무렵부터 서울에서 숙명여고 출신인 김씨영과 동거하다.

1941년 (40세)
3월 서울 광장리로 이거하다. 5월에 《탁류濁流》재판이 간행되나 6월 27일자로 조선총독부의 3판 발행 금지처분을 받다. 장편 《金의 열정情熱》이 영창서관에서 출판되다.

1942년 (41세)
김씨영과의 사이에서 삼남 병훈이 출생하다.

1944년 (43세)
김씨영과의 사이에서 딸 영실이 출생하다.

1945년 (44세)
1월에 부친 규섭 별세하다. 장남 무열이 병사하다. 4월에 전북 임피로 하향하여 고향에서 8·15 해방을 맞이하다. 고향에서 지내는 동안 백릉의 인간성을 잘 알고 그를 존경해준 세계일보사 사장이자 고향사람인 김형양과 교우를 맺고 지내다. 고향 친우로는 고형곤과 사회주의 사상이 짙은 작가 이근영이 있다. 문단에서는 이무영과 각별한 사이였고, 전주의 신석정과는 지리적으로 가까워 자주 만나다. 선배작가로는 김동인과 염상섭을 좋아했다. 해방 후 서울 서대문 충정로 1가 75로 이거하다.

1946년 (45세)
작품집 《제향날》이 박문출판사에서 출판되다. 향리인 전북 임피로 다시 내려가다.

1947년 (46세)
모친 조우섭 별세하고, 김씨영과의 사이에서 사남 영훈이 출생하다. 익산군 북일면 고현리으로 이거하다. 이때 이미 폐결핵을 앓았고 빈곤과 실의 속에서 우울한 날들을 보내다.

1948년 (47세)
단편집 《잘난 사람들》이 민중서관에서, 《당랑의 전설》이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되다.

1949년 (48세)
익산시 주현동으로 다시 이거하다.

1950년 (49세)
봄에 익산시 마동 269번지로 이거하다. 6월 11일 오전 11시 30분 폐환으로 전북 익산시 마동 269번지에서 영면하다. 유택幽宅은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 선영하先塋下.

1984년
2월에 ‘백릉채만식선생문학비白菱蔡萬植先生文學碑’가 군산시 월명동 월명공원에 건립되다.

1989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채만식전집 1∼10》이 출간되다.

1996년
군산시 문화동 886번지에 ‘백릉채만식문학관白菱蔡萬植文學館’이 건립되다. 이 곳에서는 채만식의 육필원고와 생전의 사진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채만식에 관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탁류》의 배경지인 미두장·조선은행·째보선창 등 세 곳에 군산문화원에서 채만식 소설비를 세우다.

2000년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주관으로 ‘백릉 채만식 선생 50주기 추모 심포지엄’이 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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