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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에 합일된 사람성주의(외)

1. 이 책은 잡지 《개벽》에 실린 이돈화의 글을 묶은 것이다. 본명 이돈화와 필명 야뢰夜雷로 발표된 글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익명으로 쓴 사설이나 창해거사滄海居士나 백두산인白頭山人 같은 필명으로 작성한 글은 제외하였다. 2. 한자식 표기는 현대어로 고치되, 필요한 한자어는 부기하였다. 종결어미는 가능한 한 그대로 두어 글쓴이의 의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3. 검열에 의해 삭제된 부분은 본문에 나온 기호대로 표기하고(예-○○, ××),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하였다. 4. 현재의 표기법이나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 단어나 구절은 원문의 표기대로 작성하였다. 5. 동일한 글임에도 잡지 목차와 본문의 제목이 다른 경우 본문의 제목을 기준하였다. 6. 본문 중 왕력王曆이나 태세太歲 뒤에는 서..
1. 이 책은 잡지 《개벽》에 실린 이돈화의 글을 묶은 것이다. 본명 이돈화와 필명 야뢰夜雷로 발표된 글만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익명으로 쓴 사설이나 창해거사滄海居士나 백두산인白頭山人 같은 필명으로 작성한 글은 제외하였다.
2. 한자식 표기는 현대어로 고치되, 필요한 한자어는 부기하였다. 종결어미는 가능한 한 그대로 두어 글쓴이의 의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3. 검열에 의해 삭제된 부분은 본문에 나온 기호대로 표기하고(예-○○, ××), 알아볼 수 없는 글자는 □로 표기하였다.
4. 현재의 표기법이나 의미로 파악되지 않는 단어나 구절은 원문의 표기대로 작성하였다.
5. 동일한 글임에도 잡지 목차와 본문의 제목이 다른 경우 본문의 제목을 기준하였다.
6. 본문 중 왕력王曆이나 태세太歲 뒤에는 서기를 괄호 안에 써 넣어 대조할 수 있도록 하였다.
7. 발표 연도와 게재지의 호수는 글의 말미에 밝혀 두었다.
8. 주석 작업 과정에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두산세계대백과사전》(두산동아, 1996),《동아한한중사전》(동아출판사, 1998),《민중국어사전》(민중서림, 1996),《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두산동아, 1999), 《고사성어대사전》(임종욱 저, 고려원, 1997) 등을 참고하였다. 특히 천도교 경전의 풀이에는 《동학농민운동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천도교경전》(천도교중앙총부, 1969), 《신사성사법설》(천도교중앙총부, 1986)을, 사서四書 풀이에는 성백효 역주로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출판한 집주본을 참고하였다.
9. 표지의 저자사진은 이돈화의 저서 《신인철학》에 실린 것이다.
1884년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재령산載靈山 부근 화남촌花南村의 부농 집안에서 1월 18일 출생, 서당에서 교육을 받음.

1897년
고원군 인근의 영흥永興에 유학하여 한학을 배움.

1900년
본가에서 결혼이 성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귀향. 농사일을 거들다 방랑벽을 못 이겨 수차례 가출. 술과 도박으로 소일함.

1901년~1902년
3월경 동네 청년 3~4명과 함께 유랑에 나섬. 평안도 양덕을 지나 황해도 수안遂安에 이르러 잠시 금점꾼金店軍 노릇을 함. 황주黃州, 신천信川, 평양, 평안남도 진남포鎭南浦, 함경남도 장진長津을 거쳐 삼포三浦에서 이덕대李德大라는 인물과 금광을 벌임. 이덕대가 살인사건에 연루되자 홀로 도피해 평안북도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에서 투전으로 생활비와 여행비를 마련.

1903년
의주義州를 거쳐 음력 7월경 용암포龍岩浦에 도착. 용암포에 창궐한 콜레라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고향이 그리워져 10월경 귀향. 어머니와 동학 접주인 진외종조(陳外從祖, 아버지의 외삼촌)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 ‘동학군에 들어가면 돈 없이도 잘 돌아다닐 수 있다'는 진외종조의 다짐이 선택의 주요 원인이 됨. 입교 후에도 한동안 술과 도박을 가까이했으나 일명 손도통孫道通이라 불리던 인물과 친교를 맺은 후 경전을 읽고 수도하기 시작. 양덕陽德의 수접주首接主 이정방李正芳, 해該접주 차씨(車氏, 이돈화의 진외종조) 아래에서 포교 활동을 편 지 한 달 만에 접주가 됨.

1904년
의암 손병희의 주도로 만들어진 진보회進步會에 평의원으로 참여.

1905년
평양일어학교 속성과에 입학. 졸업 후 관북지역에서 교원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됨(이돈화의 동료 박달성은 이돈화가 ‘정주 곽산에서 교사 노릇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음).

1910년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에서 잠시 일하다 의암 손병희의 추천으로 ‘천도교회월보사’ 사원이 됨. 《천도교회월보》 창간호(1910.8)부터 야뢰, 백두산인, 창해거사 등의 필명과 실명으로 꾸준히 글을 기고함.

1919년
3.1운동으로 천도교지도층이 검거된 후 교단정비를 위해 결성된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에 박래홍, 박달성, 정도준 등과 함께 창립동인이 됨(9월).

1920년
천도교청년회 조직(3월). 천도교청년회 편집부 사업으로 차상찬, 방정환, 김기전, 박달성과 함께 개벽사를 설립하고 《개벽》발간. 편집인으로 활동. 평안도와 함경도 등지로 순회강연을 다님.

1922년
천도교 중앙총부 편집과 주임이 됨(1월). 《부인婦人》(1922.6~ 1923.9)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활동(6월).

1923년
《부인婦人》의 후신인 《신여성新女性》을 창간하고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활동. 천도교 중앙종리원 종리사 겸 포덕과 주임이 됨. 박사직, 조기간, 차상찬, 박래홍, 김기전 등과 함께 천도교청년회를 천도교청년당으로 개편하고 강령과 당헌을 제정(9월).

1924년
《인내천요의人乃天要義》, 《수운심법강의水雲心法講義》 간행.

1925년
천도교 신·구파 내분 시 신파에 가담. 《천도교리독본》 간행.

1926년
천도교중앙총부의 기관지 《신인간》 창간(5월). 편집인 및 발행인으로 활동.

1930년
《신인철학新人哲學》 간행.

1933년
《천도교창건사》 간행.

1934년
중앙종리원 대령사의 부대령이 됨(12월).

1935년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議》 간행.

1936년
중앙종리원 대령사의 대령이 됨.

1937년
현기실 상주현법사常住玄法師가 됨.

1938년
《수도요령修道要領》 간행.

1940년
현기사 상주선도사常住宣道師가 됨.

1942년
《천도교사전天道敎史傳》 간행.

1945년
《천도교요의》 간행(필명 白頭山人 사용). 2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천도교인들을 대상으로 강연 활동.(강연 교재가 《동학지인생관東學之人生觀》으로 묶여 일부는 1963년 《신인철학新人哲學》 중간 시 부록으로 실렸으며, 1972년에 완간됨).

1950년
평안남도 양덕의 천도교 수도원에 머물며 천도교 원로격인 북한천도교 종무원 연원회淵源會 의장으로 활동. 12월 초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인민군의 전세가 역전되던 무렵 수도원에 남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행방불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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