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책에 실은 작품은 발표 당시의 잡지(혹은 단행본)에 실린 것을 저본으로 하고, 전집(《이효석 전집》, 1983년, 창미사)을 참조해서 정본을 만들었다. 전집이 발간된 이후 발굴된 작품과 일어로 된 작품은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 전집》(2003년, 창미사) 및 《이효석 단편 전집》 1, 2(2006년, 가람기획)을 참조하였다. 발표 원문과 전집 사이에 발견되는 차이는 전집에 의거해서 조정하였다.
2. 어려운 어휘나 사투리, 일본어 등에는 주석을 달아서 가독성을 높였다. 어휘 풀이는 국립국어연구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참조하였다. 표기는 가급적 원문의 분위기를 살리면서 표준어 표기법을 따랐으며, 대화는 원문을 최대한 수용하고자 하였다.
3. 수록 순서는 단편소설, 중편소설, 콩트, 수필, 평론으로 하였고 발표 연대순에 의거해서 실었다. 발표 연월일은 각 작품 뒤에 밝혀 놓았다.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진부 면장을 지낸 이시후와 강원도 홍천군 기린면 진동리 출신의 강홍경 사이에서 1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남. 호는 가산可山. 필명은 아세아亞細兒, 효석曉晳.
1910년
부친이 서울에서 교편을 잡아서 모친과 함께 서울로 이주.
1912년
가족과 함께 강원도 진부로 내려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함.
1914년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0년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에 무시험 입학.
1923년
고보 4, 5학년 무렵에 체홉을 비롯한 토마스 만과 맨스필드, 사샤 기트리의 희곡집 등을 읽음.
1925년
경성제일고보 졸업, 유진오와 함께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 처음으로 《매일신보》(1. 18)에 시 〈봄〉과 콩트 〈여인〉(2. 1)을 발표.
1927년
《청년》(3월)에 단편 〈주리면〉 발표. 예과를 걸쳐 법문학부 영문과에 진학.
1928년
《조선지광》(7월)에 단편 〈도시와 유령〉 발표. 유진오와 함께 ‘동반자작가’로 불리어짐.
1929년
《조선지광》(6월)에 단편 〈기우〉, 《조선문예》(6월)에 단편 〈행진곡〉, 《중외일보》에 시나리오 〈화륜〉 발표.
1930년
경성제대 졸업. 《대중공론》(4월)에 단편 〈깨트러진 홍등〉, 《신소설》(5월)에 단편 〈추억〉, 《대중공론》(6월)에 단편 〈상륙〉, 《조선일보》(8. 9~20)에 단편 〈마작철학〉, 《신소설》(9월)에 단편 〈북국사신〉, 《삼천리》에 단편 〈약령기〉 발표.
1931년
《동아일보》(3. 3~4. 1)에 시나리오 〈출범시대〉, 《대중공론》(6월)에 단편 〈노령근해〉 발표. 첫 창작집 《노령근해》 발간. 《신흥》(7월)에 단편 〈오후의 해조〉, 《동광》(12~1932. 2)에 단편 〈프렐류드〉 발표. 7월에 함북 경성 출신으로 나진고등여학교를 졸업한 6년 연하의 이경원과 결혼. 일본인 은사〔草深常治〕의 소개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으나 주위의 비판이 거세자 그만두고 부인의 고향인 경성으로 낙향.
1932년
《삼천리》(3월)에 단편 〈북국점경〉 및 〈오리온과 능금〉 발표. 함북 경성농업학교의 영어교사로 취직.
1933년
《신여성》(3월)에 미완의 장편 〈주리야〉 발표. ‘구인회’ 창립에 참여. 《조선문학》(10월)에 단편 〈돈〉 발표, 《삼천리》(11월)에 단편 〈수탉〉 발표.
1934년
《매일신보》(1. 3~8)에 단편 〈마음의 의장〉, 《삼천리》(11월)에 단편 〈일기〉, 《중앙》(12월)에 단편 〈수난〉 발표. 평양 창전리 48번지로 이사.
1935년
《중앙》(7월)에 단편 〈계절〉, 《조선일보》(10. 11~31)에 중편 〈성화〉, 《조선문단》(8월)에 단편 〈성수부〉 발표.
1936년
《중앙》(1월~2월)에 단편 〈분녀〉, 《삼천리》(1월)에 단편 〈산〉, 《신동아》(3월)에 단편 〈들〉, 《사해공론》(4월)에 단편 〈천사와 산문시〉 발표. 숭실전문학교 교수 취임. 《조광》(7월)에 단편 〈인간 산문〉, 《여성》(8월)에 단편 〈석류〉, 《사해공론》(9월)에 단편 〈고사리〉, 《조광》(10월)에 대표작 〈모밀꽃 필 무렵〉 발표.
1937년
《백광》(1월)에 단편 〈낙엽기〉, 《여성》(4월)에 단편 〈성찬〉, 《백광》(6월)에 단편 〈삽화〉 발표. 《조광》(10월)에 단편 〈개살구〉, 《여성》(10~1938. 4)에 중편 〈거리의 목가〉, 《조선문학》(12월)에 단편 〈마음에 남는 풍경〉 발표.
1938년
《삼천리문학》(1월)에 단편 〈장미 병들다〉, 《동아일보》(5. 5~14)에 단편 〈막〉, 《광업조선》(9월)에 단편 〈공상구락부〉, 《사해공론》(9월)에 단편 〈부록〉, 《농민조선》(9월)에 단편 〈소라〉, 《조광》(10월)에 단편 〈해바라기〉, 《야담》(12월)에 단편 〈가을과 산양〉 발표.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로 부임.
1939년
《조광》(1월)에 단편 〈여수〉, 《문장》(2월)에 단편 〈산정〉 발표. 장편 《화분》을 《조광》에 연재. 단편집 《해바라기》 발간. 《문장》(7월)에 단편 〈황제〉, 《여성》(9월)에 단편 〈향수〉, 《인문평론》(10월)에 단편 〈일표의 공능〉, 《문장》(12월)에 희곡 〈역사〉를 발표. 작품집 《성화》 발행, 《화분》 발행.
1940년
《매일신보》(1. 25~7. 2)에 장편 《창공》(후에 ‘벽공무한’으로 개제) 연재. 일본 잡지 《문예》(7월)에 일어로 된 단편 〈은은한 빛〉, 《문장》(10월)에 단편 〈하르빈〉 발표. 부인과 차남(영주)의 연이은 사망. 만주 일대를 방랑하다가 귀국해서 기림리 정착.
1941년
《문장》(2월)에 단편 〈라오콘의 후예〉, 《춘추》(5월)에 단편 〈산협〉, 《국민문학》(11월)에 일어로 된 단편 〈엉겅퀴의 장〉 발표. 박문서관에서 《이효석단편선》과 장편 《벽공무한》 발행.
1942년
《삼천리》(1월)에 단편 〈일요일〉, 《춘추》(1월)에 단편 〈풀잎〉 발표. 평양 도립병원 입원. 결핵성 뇌막염으로 치료가 불가능해서 퇴원. 5월 25일 기림리 자택에서 36세로 영면.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 매장.
1943년
《천도교사전天道敎史傳》 간행.
1945년
단편 〈만보〉가 유고로 《춘추》 7월호에 발표. 작품집 《황제》 발행.
1960년
‘춘조사’에서 5권의 《효석 전집》 간행.
1973년
묘소를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로 이장.
1983년
‘창미사’에서 《이효석 전집》 전 8권 출간.
1998년
묘소를 경기도 파주로 이장.
2003년
‘창미사’에서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 전집》 전 8권 출간.
2005년
‘해토’에서 일본어 작품집 《은빛 송어》(김남극 편)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