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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날(외)

1. 이 책은 이익상의 소설과 비평, 수필을 묶은 것이다. 이익상의 신문연재 장편 소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설과 비평, 수필은 새롭게 발굴해 수록했다. 2. 최초로 지면화 된 작품들을 원전으로 삼았다. 다만, 이익상의 유일한 단행본인 《흙의 세례》(문예운동사, 1927)는 예외로 하여,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저본으로 삼았다. 3. 발표 연도나 게재지는 글의 뒤에 달아 독자와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4. 작품 중 훼손으로 인해 해독이 불가능한 부분은 ○으로 표기했다. 5. 원전에 표현된 작가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작가의 어투와 표현을 살리면서도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현대 표기로 고쳤다. 6. 한자는 부기하였으며, 해설이 필요한 단어나 용어는 주석을 달아 설명했다. 7...
1. 이 책은 이익상의 소설과 비평, 수필을 묶은 것이다. 이익상의 신문연재 장편 소설을 제외한 대부분의 소설과 비평, 수필은 새롭게 발굴해 수록했다.
2. 최초로 지면화 된 작품들을 원전으로 삼았다. 다만, 이익상의 유일한 단행본인 《흙의 세례》(문예운동사, 1927)는 예외로 하여, 단행본에 수록된 작품을 저본으로 삼았다.
3. 발표 연도나 게재지는 글의 뒤에 달아 독자와 연구자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4. 작품 중 훼손으로 인해 해독이 불가능한 부분은 ○으로 표기했다.
5. 원전에 표현된 작가의 의도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작가의 어투와 표현을 살리면서도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현대 표기로 고쳤다.
6. 한자는 부기하였으며, 해설이 필요한 단어나 용어는 주석을 달아 설명했다.
7. 이익상의 희귀자료를 흔쾌히 제공해 준 오영식 선생님(보성고등학교)께 감사드린다.
1895년
2월 11일 전북 전주 대화정 24번지에서 이건한과 김성녀의 둘째 아들로 출생. 호적상의 이름은 이윤상李允相.

1908년
전주제일공립보통학교 졸업.

1914년
보성중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 수료.

1915년
영월 신씨 신기량의 삼녀 신계정 씨와 결혼(자녀로 딸 선옥·선동·선남·선희·선향을 둠), 부안공립보통학교 교원 생활.

1919년
〈낙오자〉가 《매일신보》 선외 가작으로 뽑힘.

1920년
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 입학. 전주 출생 일본유학생회 모임인 ‘전주 서조회’ 회원 자격으로 고향을 방문해 〈예술과 실생활〉이라는 주제로 강연함. 김억金億·남궁 벽南宮璧·오상순吳相淳·황석우黃錫禹·변영로卞榮魯·염상섭廉想涉·민태원閔泰瑗과 함께 《폐허》 동인 창간 후 2호(1921. 1.)에 참여.

1921년
하기 방학 중 ‘동경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의 전국순회강연 활동 참여해 성진·길주 등지에서 〈생활과 개조〉라는 주제로 강연함. 《학지광》에 〈번뇌의 밤〉 〈망우 최인군의 추억〉 등을 발표.

1922년
김과전金科全. 이용기李龍基 등 11명과 함께 1922년 2월 4일자 《조선일보》에 〈전조선노동자 제씨에게 격함〉이라는 ‘동경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 선언 발표. 일본대학 동기인 야마구치山口誠子와 연애.

1923년
야마구치와의 사이에 정晶 출생. 후에 아들 정晶을 신계정 소생으로 호적에 입적. 귀국 후 박영희·안석주·김형원·김복진·김기진·연학년·이상화 등과 함께 〈파스큘라〉 조직.

1924년
4월 개벽 46호에 〈연의 서곡〉 발표. 9월 《조선일보》 입사. 야마구치는 《경성일보》 기자로 입사. 《조선일보》에 첫 장편 〈젊은 교사〉 연재.

1925년
카프 조직 발기인으로 참여. 각종 강연회에서 〈민중이 요구하는 문예〉 〈현대 교육〉 등의 주제로 강연함. 《개벽》에 대표작인 〈흙의 세례〉 〈어촌〉 〈광란〉 등 발표.

1926년
단편소설집 《흙의 세례》를 문예운동사에서 간행. 나카니시 이노스케中西伊之助의 〈열풍熱風〉을 《조선일보》에, 〈여등汝等의 배후背後에서〉를 《중외일보》에 연재 번역. 〈여등汝等의 배후에서〉를 문예운동사에서 간행.

1927년
1월 7일 결성된 〈조선문예가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 최서해·김광배 등과 더불어 〈문예가협회〉 간사직 맡아 활동. 이 즈음 야마구치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아들 정晶과 함께 경성을 떠남. 8월 9일 《조선일보》 퇴사하고 《동아일보》로 이직. 유엽의 도움으로 전주의 가족·서울로 이사해 함께 생활.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 중에 안석주(조선일보) 이서구(매일신보) 김기진(중외일보) 등 연예부 기자와 함께 ‘찬영회’ 조직.

1928년
3월 1일자로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발령.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발기인으로 참여.

1930년
2월 5일 《동아일보》 학예부장 의원 해직. 《매일신보》 편집국장 대리로 발령.

1931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그들은 어디로〉 연재.

1935년
4월 19일 오후 7시 30분 경성 연건동 270번지 자택에서 동맥경화증으로 숨짐. 당시 《매일신보》 편집국장 재직 중이었고, 4월 21일 오후 2시 각황사에서 영결식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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