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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 열차(외)

1. 이석훈의 소설·희곡·수필 작품들을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잡지와 신문에 발표된 것을 원본으로 하되,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현대 표기로 고치고, 필요한 한자는 부기하였다. 2. 어려운 어휘나 사투리, 일본어, 낯설다고 여겨지는 인명에는 주석을 달았다. 단, 어려운 어휘라도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것은 주석을 달지 않았다. 외래어는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고 굳어지지 않은 외국어는 ‘ ’로 묶어 구분하였다. 본문 ( )속 작은 표기는 작가가 주석을 단 것임을 밝혀둔다. 3. 소설·희곡·수필 등 장르별로 수록하되 대체로 발표 연대순으로 실었다. 발표 게재지와 발표 연월을 각 작품 뒤에 밝혀 두었다. 4. 원본에 “ ” 또는 ( )으로 묶여 있는 회상 부분은 ‘ ’으로 통일시켰다. 원본에 ‘말없음’을 표..
1. 이석훈의 소설·희곡·수필 작품들을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잡지와 신문에 발표된 것을 원본으로 하되,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현대 표기로 고치고, 필요한 한자는 부기하였다.
2. 어려운 어휘나 사투리, 일본어, 낯설다고 여겨지는 인명에는 주석을 달았다. 단, 어려운 어휘라도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것은 주석을 달지 않았다. 외래어는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고 굳어지지 않은 외국어는 ‘ ’로 묶어 구분하였다. 본문 ( )속 작은 표기는 작가가 주석을 단 것임을 밝혀둔다.
3. 소설·희곡·수필 등 장르별로 수록하되 대체로 발표 연대순으로 실었다. 발표 게재지와 발표 연월을 각 작품 뒤에 밝혀 두었다.
4. 원본에 “ ” 또는 ( )으로 묶여 있는 회상 부분은 ‘ ’으로 통일시켰다. 원본에 ‘말없음’을 표시하기 위해 …… 또는 ―로 되어 있는 부분 중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 삭제했다. 궐자闕字 부분은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주석을 달았다.
1907년
1월 27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정주읍 성외리城外里에서 부 이준기李埈基 모 방준원方埈媛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석훈錫. 아호는 금남琴南. 필명은 석훈錫 또는 목양牧洋. 본관은 단양丹陽. 위로 누님 석연錫娟이 있고, 서제庶弟로 석영錫瑩이 있음.

1920년
(14세) 정주공립보통학교 졸업.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1925년
(19세)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으로 감. 도쿄(東京) 와세다(早稻田)대학고등학원 문과 입학. 여기서 러시아문학을 전공함. 이후 와세다대학고등학원을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노문과에서 수학함.

1928년
(22세) 귀국. 동향인이며 평양 서문고녀西門高女 출신의 김득신金得信과 결혼. 김득신은 당시 평북 용암포보통학교 교원이었음. 결혼 후 강원도 김화에서 잠시 신문지국을 경영함. 서울로 이주함.

1929년
(23세) 춘천으로 이사하여 이후 3년간 《경성일보》와 《오사카(大阪)매일신보》의 춘천특파원. 소설 〈아버지를 찾아서〉(조선일보, 1929. 10. 31~11.7) 발표, 문단 데뷔. 부친 타계. 장남 호우虎羽 출생. (1946년 경기고 43회 졸업. 1950년 서울대 의대 본과 3학년 재학 중 6?5 전쟁의 와중에서 실종됨)

1930년
(24세) 본명으로 희곡 〈궐녀厥女는 왜 자살했는가〉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투고 당선, 발표(동아일보, 3.4~9). 평문 〈근자의 논단 풍경〉(매일신보, 7. 6) 발표.

1932년
(26세) 춘천에서 서울로 돌아와 종로구 도렴동에서 살다. 개벽사 근무. 시 〈서울구경〉(동아일보, 3.29~4.1), 단편 〈직업고職業苦―어떤 신문기자의 일기〉(매일신보, 5.8~12), 〈로짠의 사死〉, 논문 〈신연애론〉(신동아, 12월호), 수필 〈동성애 만담〉(동아일보 3.17,19) 〈가을과 향수〉(동광, 10월호), 평문 〈임경일 씨 역, ‘인니즈푸리 고도孤島의 호수’〉(매일신보, 6.23) 등 발표. 차남 대우大羽 출생.

1933년
(27세) 종로구 사직동으로 이사. 단편 〈이주민열차〉(제1선, 2월호), 〈궐녀의 인생철학〉(신여성, 8월호), 〈궐녀의 길〉(신여성, 10월호), 〈단편집〉(조선문학, 11월호), 희곡 〈그들 형제〉(제1선, 3월호), 〈기사위리예〉(조선일보, 7. 8), 장편 〈황혼의 노래〉(신동아, 6~12월호), 수필〈고 송계월 양의 프로필〉(신가정, 7월호), 〈‘라디오 풍경’과 ‘라디오 드라마’〉(동아일보 10.1) 〈낭만적 시집〉(신동아, 10월호), 평문 〈문예우감文藝偶感〉(매일신보, 8.26~30) 등 발표. 4월, 극예술연구회 가입. 초여름, 개벽사 사직. 경성방송국 제2방송과 근무.

1934년
(28세) 꽁트 〈한몽寒夢〉(신여성, 4월호), 〈동Q의 실연〉(중앙, 4월호), 〈눈물의 산문시〉(중앙, 9월호), 단편 〈광인기狂人記〉(조선일보, 11.22~12.1), 수필〈시 3편〉(신동아, 2월호), 시〈춘천풍물시〉(월간매신, 6월호), 희곡 〈추醜〉(중앙, 2월호), 〈그 여자의 지옥〉(중앙, 11월호), 논문 〈라디오 드라마에 대하여〉(극예술, 1호), 평문 〈문학건설의 정열〉(조선일보, 1.10), 〈평론가 무용론자의 독백〉(조선일보, 2.10~11) 등 발표.

1935년
(29세) 단편 〈가난병〉(조선문단, 5월호), 수필 〈애도艾島의 봉죽놀이〉(중앙, 2월호), 〈금강산과 나〉(중앙, 7월호), 〈작금의 감상〉(학등, 8월호), 〈문예 노트〉(학등, 9월호), 〈나와 개구리〉(조광, 11월호), 논문 〈라디오극과 그 효과에 대하여〉(예술, 1호), 〈문예가협회 조직기타〉(예술, 2호), 평문 〈발자크적 방법〉(조선일보, 7.9), 〈권위 있는 평가評家의 대망〉 (조선일보, 1.2), 〈우감偶感〉(조선문단, 2월호) 등 발표. 3남 승우勝羽 출생.

1936년
(30세) 평양방송국 방송주임으로 옮김. 단편 〈결혼〉(조광 1월호), 〈회색가灰色街〉(조선일보, 5.8~29), 〈정부情夫〉(여성, 6월호), 꽁트 〈사엽四葉클로버의 꿈〉(여성, 4월호), 〈동Q의 구직〉(사해공론, 4월호), 〈Q군과 밤차〉 (여성, 5월호), 수필 〈산턱 원두막 정주성의 옛봄〉(조광, 4월호), 〈방송잡기〉(중앙, 1월호), 〈작가 인상기〉(중앙, 4월호), 〈속 작가 인상기〉(중앙, 5월호), 〈해안〉(중앙, 7월호), 평문 〈문단에 던지는 말〉(사해공론, 2월호) 〈신극 수립과 ‘관중본위’ 문제〉(조선일보, 3.10~14), 〈7월창작평〉(조선일보, 7.4~10) 등 발표.평양에서 문예지 《낙랑문고》를 창간. 평양시 상수리 33번지에서 살다. 소설집 《황혼의 노래》(한성도서) 간행.

1937년
(31세) 단편 〈초련〉(여성, 3월호), 〈제수〉(풍림, 3월호), 〈질투〉(백광, 5월호), 작가 김유정金裕貞 추도 특집 〈유정과 나〉(조광, 5월호), 〈유정의 영전에 바치는 최후의 고백〉(백광, 5월호), 수필〈아나운서〉(조광, 5월호) 등 발표.

1938년
(32세) 봄, 모친 타계. 여름, 신설된 함흥방송국 방송과장으로 전임. 단편, 〈퀘이트의 젊은 미망인〉(여성, 5월호), 〈여자의 불행〉(조광, 8월호), 수필 〈따옥새 울음〉(조광, 3월호), 〈초하온천행각〉(여성, 6월호), 〈레미제라블의 소년〉(조광, 7월호), 〈결혼의 행복〉(사해공론, 9월호) 등 발표. 함흥에서 윤고종, 한효, 한설야, 김송 등과 함께 연극단체 ‘문예좌文藝座’를 조직.

1939년
(33세) 5월, 함흥 방송국 사직하고 조선일보사 출판부로 전직. 미아리 밖 창동으로 이사. 단편 〈카이제르와 이발사〉(조광, 2월호), 〈만춘보晩春譜〉(농업조선, 7월호), 〈라일락 시절〉(문장, 8월호), 〈폭풍우의 밤〉(야담, 9월호), 희곡 〈만추晩秋〉(문장, 7월 임시 증간호), 수필 〈함주咸州풍물첩〉(삼천리, 1월호), 〈오야장梧野莊 잡필〉(조선문학, 6월호), 〈타락한 학교〉(박문, 10월 창간호), 〈유정裕貞의 면모편편〉(조광, 12월호) 등 발표.《조광》, 《여성》지 근무.

1940년
(34세) 중편 〈백장미부인〉(조광, 1~6월호), 〈춘소春宵〉(매일신보, 3.30~5. 11), 단편 〈바다의 탄식〉(태양, 2,3월 합호), 〈하르빈의 비밀〉(신세기, 4월호), 〈부채負債〉(문장, 5월호), 〈유랑〉(인문평론, 6월호) 〈소작인 덕보〉(청색지), 수필 〈모델소설고考〉(인문평론, 5월호),〈작가와 직업〉(조광, 7월호), 〈문학풍토기―평양편〉(인문평론, 8월호), 평문 〈제재題材의 개척〉(매일신보, 9.20), 〈오식과 잡지〉(매일신보, 9.25), 〈독자의 양문제〉(매일신보, 9.26) 등 발표. 4남 민우民羽 출생.

1941년
(35세) 단편 〈재출발〉(문장, 2월호), 〈ふるさと〉(녹기, 3월호), 〈黎明或る序章〉(국민총력, 4월호), 〈애견가의 수기〉(춘추, 6월호), 〈靜かな嵐〉(국민문학, 11월호), 희곡 〈사비루泗틦樓의 달밤〉(문장, 4월호) 등 발표.

1942년
(36세) 단편 〈隣りの女〉(녹기, 3월호), 〈東への旅〉(녹기, 5월호), 〈夜〉(국민문학, 6월호), 〈先生たち〉(동양지광, 8월호), 〈靜かな嵐(속편)〉(녹기, 11월호), 〈漢江の舟唄〉(신여성, 11~12월호), 장편소설 〈永遠の女〉(경성일보 조간, 10.28~12.7), 수필 〈생활의 발견〉(야담, 6월호), 〈정향화 필 때〉(야담, 8월호), 〈하늘의 영웅〉(야담, 12월호), 문예시평 〈국민문학의 문제〉(매일신보, 3.7), 〈전쟁문학과 작가〉(매일신보, 3.9), 〈일본적인 것의 일면〉(3.11), 〈낭만주의 대망〉(매일신보, 3.12), 〈이십칠세기의 신화〉(매일신보, 8.17~20), 〈主觀と客觀〉(조광, 3월호), 〈名作硏究-不屈のドイツ精神〉(국민문학, 10월호) 등 발표.

1943년
(37세) 단편 〈北の旅〉(국민문학, 6월호), 〈旅のをはり〉(녹기, 6월호), 〈기쁨의 날〉(야담, 6월호), 〈豚追遊戱〉(국민문학, 7월호), 〈血緣〉(동양지광, 8월호), 〈最後の家寶〉(신시대, 8월호), 〈봉도물어蓬島物語〉(국민문학, 9월호), 〈母の告白〉(조광, 9월호) 등 발표. 작품집 《靜かな嵐》(매일신보사, 6월) 간행.

1944년
(38세) 연초, 만주 장춘長春으로 가 염상섭이 국장으로 있던 《만선일보滿鮮日報》에서 객원 근무. 단편 〈善靈〉(국민문학, 5월호), 〈滿洲の白系ロシヤ文學〉(국민문학, 3월호), 〈最近の華北文壇〉(국민문학, 6월호), 〈金鍾漢·人及作品(국민문학, 11월호) 등 발표.

1945년
(39세) 오영吳瑛의 〈만주여류작가군상滿洲女流作家群像〉을 초역抄譯(국민문학, 2월호) 발표. 작품집 《봉도물어》 (보문사, 3월) 간행. 광복을 장춘長春에서 맞다. 9월 서울 종로구 필운동 2번지 집으로 돌아와 칩거, 번역으로 생활함.

1946년
(40세) 《똘똘이의 모험-남양편》(금융도서) 간행.

1947년
(41세) 친일문학에 대한 반성적 수상문 〈고백〉(백민, 1월호) 발표. 《순국혁명가열전》(조선출판사) 및 번역서 B.고르바또프의 《항복 없는 백성》(창인사), 톨스토이의 《부활》(대성출판사), 소설집 《황혼의 노래》 재판(조선출판사) 간행. 서울 종로구 옥인동 157번지 2호로 이사. 해군 정훈장교 중위로 입대.

1948년
(42세) 《문학감상독본》(백민문화사), 번역서 코난 도일의 《바스커빌의 괴견》(야사연구실), 《심야의 음모》(세계서림) 등 간행. 단편 〈문화촌〉(농토) 발표.

1949년
(43세) 국방부 정훈국을 거쳐 해군본부 초대 정훈감 서리(소령)로 근무. 회상기 〈잊히지 않는 문인들―심훈·효석·유정·계월·신애 등 편모〉(삼천리, 12월호) 발표.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으로 이사.

1950년
(44세) 단편 〈고향 찾는 사람들〉(백민, 별책특집 ‘현역작가 33인집’), 수필 〈문학자의 심혼〉(서울신문, 2.16~7) 발표. 연초에 해군에서 전역. 6.25전쟁 발발. 7월 9일 종로구 통의동 누님집에 다녀오다가 북한 당국에 피체, 중구 소공동 소재 정치보위부에 수감됨. 이후 7월 하순께 서대문 형무소(당시 교화소)로 이감된 사실이 확인되었으나 그 후의 행적은 묘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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