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윤(玄相允, 1893~1950)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1893년 7월 14일 연주延州 현씨玄氏 24대손인 성균관 전적典籍 현석태玄錫泰의 차남으로 출생. 자는 집중執中, 초호初號는 소성小星, 개호改號는 기당幾堂이며 관서지방의 유학자인 현진암玄鎭菴이 그의 스승이다.
어려서부터 15세까지 경의재經義齋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6세인 1909년에 정주 도호육영소학교를 수료하고 도산이 창립한 평양대성에 입학한 후, 105인 사건으로 대성중학이 강제 폐쇄되자 1912년 경성 보성중학으로 전학하였다. 1913년 이를 졸업한 후 선진학문을 더 배우기 위해 1914년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한다. 동경유학생 시절 유학생회지 《학지광》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시, 소설, 수필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1918년 3월 ‘사학과 사회학과’를 우수하게 졸업한다. 그의 졸업논문인 〈동서문화의 비교연구〉는 동경학계에서 칭송이 자자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으며, 지도교수인 게무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 교수는 이 논문이 와세다 학생들만 읽기는 아깝다 하여 그 당시로는 매우 이례적으로 동경제국대학의 학보에다 주선하여 싣게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하여 모교인 보성학교의 초청을 사양하고 김성수의 요청을 받아들여 1918년 경성 중앙학교 학감으로 취임한다. 중앙학교 교사 시절 그는 교장 송진우와 사택에서 함께 기거할 정도로 의기가 투합하였으며,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3인은 늘 사택에 모여 시국에 대한 의논과 토론으로 지기志氣가 상통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3·1운동이 모의된다. 현상윤은 이 모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제2차, 제3차 독립운동을 위해 젊은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33인에 끼지 않고 48인에 남아 2년간 투옥된 바 있다. 1921년에 출옥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3·1운동 후에도 우리 민족이 아무런 권리와 자유를 갖지 못한 채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보고 계속 ‘거듭나기’를 주장했다. 다시 중앙학교에 복직하고 1922년 교장에 취임한 후 1946년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거쳐 6·25때 납북되기까지 그는 평생 교육에 전력을 다하며 교육구국운동을 벌인다. 1910년대인 유학생 시절에는 ‘실력양성론’의 대표격 인물이었으며, 이러한 입장은 거의 변함이 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견지해 나간다.
단편소설에 〈한의 일생〉(《청춘》 2호,1914.11) 〈박명〉(《청춘》 3호, 1912.12) 〈재봉춘〉(《청춘》 4호,1915.1) 〈청류벽〉(《학지광》 10호, 1916.9) 〈광야〉(《청춘》 7호, 1917.5) 〈핍박〉(《청춘》 8호, 1917.6)이 있으며, 이외 10여 편의 시와 수필을 남겨 놓고 있다.
논설로는 〈강력주의와 조선청년〉(《학지광》 6호,1915.7) 외에 이광수와 논쟁을 벌인 〈이광수군의 ‘우리의 이상’을 독함〉(《학지광》 15호, 1918.3) 등 수십 편의 글이 있다. 논저로는 《기당문집幾堂文集》 상곀?상: 신병요양기간에서부터 해방까지의 저술. 주로 서간문과 그 선대의 묘표문과 한시, 하: 3·1운동 발발이 개략 3·1운동의 의의 등 수록)과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1949.11)와 《조선사상사朝鮮思想史》(미완, 1949)가 있다.
양건식(梁建植, 1889~1938)
소설가, 중국문학번역가, 야담작가, 거사불교운동가로 활동. 호는 국여菊如, 백화白華, 노하산인蘆下山人, 노하생蘆下生, 금래今來, 성서한인城西閑人, K.S.R., 천애天愛, 한 등이 있다.
경기도 양주楊州에서 출생, 관립官立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 졸업 후 이능화李能和와 함께 거사불교운동居士佛敎運動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로 1910년대 초기부터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總報》의 기자로 있으면서 불교계몽운동을 실천하였다.
그의 작업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은 불교를 재해석함으로써 불교의 이념이 사회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이며, 식민지 조선을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임을 밝힌 부분이다. 소설 〈석사자상石獅子像〉(《불교진흥회월보》 1월호, 1915.3),〈슬픈 모순〉(《반도시론》 10월호, 1918.2) 등은 이러한 주장을 소설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진흥에 뜻을 두고 단편소설을 쓰면서 가장 의욕적으로 활동했던 1910년대와는 달리 3·1운동 이후에는 주로 중국의 문학혁명운동을 소개하고 중국희곡을 번역하면서 작품번역에 의존하였으며, 잡지 《조선문단》에서 개최한 합평회에서 염상섭, 나도향, 이광수 등과 함께 정규멤버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모는 1918년의 〈홍루몽紅樓夢〉 번역(《매일신보》 1918.3.23~10.4까지 138회)에서부터 예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년대 중반 《매일신보》에 취직한 후에는 중국야담이나 쓰는 야담작가로 전락하였다.
평론으로 〈춘원의 소설을 환영하노라〉(《매일신보》 1916.12.28~29)와 〈호적씨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문학혁명〉(《개벽》 6~7호)이 있다. 번역서로는 《서상가극西廂歌劇》(《조선문단》 9~12,1925.6~10), 《신역新譯 수호전水滸傳》(신민新民 9~18,1926. 1~10), 《노라》(영창서관,1921) 《젊은 베르테르의 비뇌悲惱》 외에 수십 편이 있다.
백대진(白大鎭, 1892~1967)
언론인이며 문학가로 활동. 호는 걱정업슬이, 파농생破聾生, D.C 생, D.C.P 생, 부지우생不知憂生, 부지우자不知憂子, 무우생無憂生, 낙천생樂天生, 낙천자樂天子, 피생, P생, ハク(하쿠세이)생, 백생白生, 도수자徒手子, 험구자險口子, 설원雪園, 설원생雪園生 등이다.
서울 필운동弼雲洞에서 출생, 매동梅洞 상업학교 및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졸업 후 1912년 인천 공립 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친일적 경향인 《신문계新文界》와 《반도시론半島時論》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를 역임했다. 범 언론인 성격의 단체인 무명회無名會 상임간사를 거쳐 친일단체인 조선협회朝鮮協會 이사, 《신천지新天地》 주간으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우익신문인 《대동신문大東新聞》 취체역(取締役:지금의 감사監事에 해당)과 회장, 홍익대 신문학과 강사를 역임했다.
식민지 초기부터 노골적인 친일활동을 한 사람으로 1922년 11월 〈일본위정자에게 여與하노라〉(《신천지》 7호)란 글로 조선 초유의 필화사건을 겪고 6개월간 투옥된 적도 있으나 이는 일본식민지 당국의 고도의 정치공작에 해당될 뿐 민족언론활동 범주에 넣기 어렵다. 해방 후에는 주로 야담작가로 활동하였으며, 야담집으로는 《한국야담사화전집》(신태양사 출판국, 1962)과 《단편야담》(경문출판사, 1963) 등이 있다.
민족의 독립보다 문명개화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명개화지상론자이다.그러나 문학분야에서는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어 한국소설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가난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철저한 인식에 의해 그의 소설은 1920년대 신경향파 소설의 전단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문학활동은 주로 1910년대에 치우쳐 있다. 1910년대 최다의 문필활동가로 비평, 소설, 시, 논문, 번역 작품 등 다수를 발표하였다. 〈현대조선에 자연주의문학을 제창함〉〈신년벽두에 인생주의파문학자의 배출함을 기대함〉〈이십세기 초두 구주歐洲 제대문학가諸大文學家를 추억함〉〈서양문학일별一瞥〉 등 문학비평은 자연주의 문학이론 형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