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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외)

1. 이 책 《사의 찬미》(외)에 실린 노래 가사들은 식민지시대에 음반으로 발표된 대중가요만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즉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한 신식 노래라고 할지라도 음반에 발표되지 않은 노래는 제외하였고, 음반에 수록되어 대중적으로 유포된 노래 중에서도 전통적 양식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는 판소리, 잡가, 민요 등을 제외하였다. 또한 현재 판단하기에 가곡이나 동요 등의 맥으로 볼 수 있는 노래들도 제외하였다. 2. 한국인에 의해 창작된 노래가 중심이 되어 있으나, 당시 매우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번안가요 몇 곡은 포함시켰다. 3. 한 작품은 제목과 작사자, 노래 가사의 순으로 정리하였고, 말미에 발표연도, 레코드번호, 작곡자, 가수 이름을 차례로 밝혔다. ‘차례’에서는, 제목과 연대를 적은 후 ‘작사자..
1. 이 책 《사의 찬미》(외)에 실린 노래 가사들은 식민지시대에 음반으로 발표된 대중가요만을 그 대상으로 하였다. 즉 당시 대중적으로 유행한 신식 노래라고 할지라도 음반에 발표되지 않은 노래는 제외하였고, 음반에 수록되어 대중적으로 유포된 노래 중에서도 전통적 양식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는 판소리, 잡가, 민요 등을 제외하였다. 또한 현재 판단하기에 가곡이나 동요 등의 맥으로 볼 수 있는 노래들도 제외하였다.
2. 한국인에 의해 창작된 노래가 중심이 되어 있으나, 당시 매우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번안가요 몇 곡은 포함시켰다.
3. 한 작품은 제목과 작사자, 노래 가사의 순으로 정리하였고, 말미에 발표연도, 레코드번호, 작곡자, 가수 이름을 차례로 밝혔다. ‘차례’에서는, 제목과 연대를 적은 후 ‘작사자/작곡자/가수’의 형태로 정리했다.
4. 제목과 노래 가사는 음반에 실린 음원을 기준으로 하였다. 음반과 함께 제공되는 가사지나, 다른 문자기록물(예컨대 노래책)과 중대한 차이가 있는 부분은 각주로 처리하였다.
5. 가사 중 진한 글씨체로 표기된 부분은 노래가 아닌 대사로 처리하는 부분이다. 또한 노래와 대사 중 남녀가 번갈아 하는 부분은 ‘(남)’, ‘(녀)’를 뒤에 표기했다. 독창부와 합창부가 번갈아 나오는 경우에는 ‘(독)’,‘(합)’을 가사 뒤에 표기했다.
6. 연대 역시 음반 발표연대를 기준으로 하였다. 그러나 1929년 이전의 노래들은 대부분 음반 이전에 노래로 유행한 후 음반화되었기 때문에, 근거자료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노래가 유행한 연도를 기준으로 정리하고, 음반 발표연대를 그 뒤에 적었다. 또한 외국에서의 음반 발표연대 등 기타 중요한 연대들은 각주로 밝혔다. ‘차례’에서도, 1929년 이전 노래의 경우 괄호 밖의 연대는 유행한 연대이며, 괄호 안은 음반발매 연대이다.
7. 작사자, 작곡자, 가수 등의 이름은 음반에 실린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따라서 상당수의 이름이 예명이다. 또한 같은 사람이라도 작품에 따라 다른 예명을 쓴 것도 있으나 그대로 두었다. 작사자의 예명, 본명 등의 사항은 뒤의 작가별 작품연보를 참고하기 바란다.
8. 제목과 가사의 표기는 모두 현대어로 바꾸었다. 단 현대어로 바꿀 경우 음절 수가 바뀌거나, 발음이 크게 바뀌는 경우는 옛 발음을 그대로 존중하였다. 예컨대, ‘님’, ‘오천 키로’ 등은, ‘임’, ‘오천 킬로’로 바꾸지 않고, 노래에서 발음하는 그대로 표기했다. 들리지 않아 불분명한 것은 ‘○○○’로 비워놓았고, 현대어로 그 의미가 불분명한 말은 당시의 발음 그대로 두었다.
9. 모든 내용은 한글로 정리하였으며,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부분만 한자를 병기하였다.
10. 이 책에 실린 노래 대부분은 참고문헌으로 제시한 복각음반이나 가요 114(www.gayo114.com)에서 원음을 들어 볼 수 있다.
강남월江南月
생몰년 미상. 같은 작품에 작사자 이름이 강남월로 나오기도 하고 남강월南江月로 나오기도 하므로 두 가지 이름은 같은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밖에 한자 표기에 차이가 있는 강남월姜南月이란 이름도 등장하는데, 같은 인물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세 가지 이름을 모두 한 사람이 사용한 것이라 가정한다면, 빅타레코드와 포리돌레코드에서 스무 곡 정도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확인된다. 그밖에 이력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다.
1933년 〈님이여〉 〈최신아리랑〉
1935년 〈신이팔청춘〉 〈백마강의 추억〉 〈태평연〉
1936년 〈고달픈 신세〉 〈낙동강 칠백 리〉 〈성화타령〉 〈가시옵소서〉

강해인姜海人
1911-1985. 전남 여수 출생. 본명은 강대은姜大恩이며 광복 이후에는 강사랑姜史浪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태평, 빅타, 포리돌레코드 등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주로 직원으로 있던 오케레코드에서 가사를 썼다. 1950년대까지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간사 등을 역임했다. 195, 60년대에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대중가요 관련 일화를 다수 소개하기도 했다.
1935년 〈승리의 거리〉
1938년 〈너무 심하오〉 〈향수〉 〈얼마나 행복일까요〉 〈정한의 포구〉
1939년 〈감격시대〉 〈뒤져 본 사진첩〉 〈안개 낀 상해〉
1940년 〈얼시구 당기〉 〈비 젖는 화륜선〉 〈진주의 달밤〉 〈북경은 좋아요〉
1941년 〈처녀항해〉
1953년 〈굳세어라 금순아〉
1955년 〈리라꽃 피는 밤〉 〈이별의 종열차〉
1956년 〈눈물의 자장가〉 〈아리랑 목동〉 〈청춘쌍곡선〉
1957년 〈무너진 부여성〉 〈사랑 찾아 칠백 리〉 〈서귀포 사랑〉
1959년 〈그대 검은 눈동자〉

고마부高馬夫
생몰년 미상. 1934년 당시 경기 개성 거주. 1934년에 잡지 《별건곤》에서 실시한 유행가 가사 현상모집에 〈베 짜는 처녀〉와 〈나도 몰라요〉가 당선된 이후 본격적으로 가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주요 음반회사에서 거의 모두 작품을 발표한 것으로 보아 한 음반회사에 오래 전속된 작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939년 당시에는 포리돌레코드 문예부 소속이었다. 상당히 많은 작품을 발표한 작가이지만, 이력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한자 표기가 다른 고마부孤馬夫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같은 사람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작곡가 정사인鄭士人이 고마부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한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1934년 〈신강남〉 〈베 짜는 처녀〉 〈나도 몰라요〉
1935년 〈그리운 옛날〉
1936년 〈갑판의 소야곡〉 〈잊으시면 몰라요〉 〈무정의 꿈〉
1937년 〈헐어진 쪽배〉 〈강남아리랑〉 〈육대도타령〉
1938년 〈산이 좋아 물 좋아〉 〈뚱딴지 서울〉
1939년 〈가야금 야곡〉 〈울리고 울던 때가 행복한 시절〉
1940년 〈바닷가의 추억〉 〈눈물의 연락선〉
1941년 〈파랑새 우는 언덕〉
1943년 〈울산 큰애기〉

김능인金陵人
1911-1937. 황해 금천金川 출생. 본명은 승응순昇應順이며, 필명이 금릉인(고향 금천의 다른 이름이 금릉이다)이라 불리기도 한다. 보성고보와 연희전문을 졸업했고, 1933년 오케레코드 창설 당시부터 작사를 하며 문예부장을 지냈다. 1920년대 말부터 문맹퇴치, 아동문학 운동에 참여했으며 신문, 잡지를 통해 시문을 발표했다. 1936년에 오케레코드 문예부장에서 물러나 요양을 하다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풍월南風月이란 필명을 썼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사후 발표된 음반에는 추엽생秋葉生이란 필명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작사가로 활동한 기간이 4년 정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1930년대 전반을 대표하는 작가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다.
1933년 〈무명초〉 〈귀향〉 〈청춘행진곡〉 〈조선찬가〉 〈고적〉 〈불사조〉
1934년 〈사랑의 고개〉 〈바다의 로맨스〉 〈이원애곡〉 〈타향〉 〈오대강타령〉 〈휘파람〉
1935년 〈등대불과 개나리〉 〈사막의 한〉 〈환영〉 〈이어도〉 〈관서천리〉 〈지는 석양〉 〈앞강물 흘러흘러〉 〈신계곡산〉
1936년 〈울며 새우네〉 〈청춘은 물결인가〉 〈남포로 가는 배〉
1937년 〈사나이 마음〉 〈산유화〉

김동진金東進
생몰년 미상.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콜럼비아레코드와 그 자매상표인 리갈레코드에서 10여 곡을 작사한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작품 대부분이 외국곡에 새로 가사를 붙인 번안곡이다.
1934년 〈떠도는 신세〉 〈병운의 노래〉 〈사랑의 유레이티〉
1935년 〈즐거운 내 살림〉 〈라라 노래하세〉
1936년 〈빛나는 청춘〉
1937년 〈정열의 산보〉

김동환金東煥
1901-?. 함북 경성 출생. 호는 파인巴人이며 김팔련金八蓮이란 필명을 쓰기도 했다. 중동학교와 일본 도요東洋대학을 졸업했고, 1924년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문단에 등장했다. 서사시 〈국경의 밤〉으로 유명하며, 1930년대 대표적인 종합잡지 《삼천리》와 문예잡지 《삼천리문학》을 발행하기도 했다. 1929년에 가요정화를 주장하며 조선가요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그러한 가요정화운동의 일환으로 직접 가사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고, 발표한 작품도 대부분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일제 말기에 친일적인 행적을 보여 이후 비판을 받았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북한에서 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1958년 이후로는 행적이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32년 〈방아타령〉
1933년 〈섬색시〉
1935년 〈인생은 삼십부터〉
1936년 〈그리운 광한루〉 〈아랫마을 탄실이〉

김상화金尙花
생몰년 미상. 김상화라는 인물의 한자 표기에는 김상화金尙花와 김상화金尙火 두 가지가 있다. 김상화金尙花의 작품으로는 〈눈물의 수박등〉 하나만이 현재 확인되고 있고, 김상화金尙火의 작품은 그보다 많아 30곡 정도가 확인된다. 두 이름이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일단은 같은 인물로 추정해 보는 쪽이 유력하다. 김상화의 출생지, 본명 등은 모두 미상이며, 이부풍은 《한국가요전집》(세광출판사, 1980)에서 그가 광복 이후 시경市警에서 문화에 관한 일을 하다가 6.25 이후 타계했다고 서술했다.
1936년 〈눈물의 해협〉 〈파도를 베개 삼고〉
1937년 〈새타령〉 〈노들강〉 〈정한의 두만강〉 〈영남은 좋을시고〉
1938년 〈떠도는 인생〉 〈망향〉
1939년 〈당신 속을 내 몰랐소〉 〈북국천리〉 〈눈물의 낙엽시〉
1940년 〈고도에 사랑 두고〉 〈눈물의 수박등〉
1941년 〈흥아의 봄〉 〈산맥을 쓸어안고〉
1947년 〈추억의 황성〉

김서정金曙汀
1898?-?. 본명은 김영환金永煥이며, 경남 진주에서 출생해 휘문의숙을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다. 무성영화시기 대표적인 변사로 유명했는데, 극장 악사로 일하다가 변사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1924년에 영화 〈장화홍련전〉을 감독한 이후 여러 영화에 각본, 감독, 제작으로 참여했고, 변사로서 많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다. 영화주제가를 만드는 일로 시작해 대중가요 창작에도 관여하여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걸쳐 중요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1930년대 중반에는 시에론레코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36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으나, 1938년까지 변사 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이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1927년 〈낙화유수〉
1928년 〈암로〉
1931년 〈강남제비〉 〈유랑의 노래〉 〈아내의 무덤〉
1932년 〈봄타령〉 〈남국의 노래〉
1933년 〈포구의 달빛〉
1934년 〈인생일기〉 〈이슬 같은 청춘〉 〈반기자 새 아침〉 〈달 뜨자 님 이별〉
1935년 〈쌍쌍화〉 〈그 시절〉

김석송金石松
1900-1983. 충남 논산 출생. 본명은 김형원金炯元이다. 보성고보를 중퇴한 뒤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조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편집국장을 맡았고, 광복 이후 1949년에는 공보처 차장을 지냈다. 6.25전쟁 중에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에서는 ‘입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계속 창작활동을 한 것으로 전한다. 1929년에 창립된 조선가요협회에 동인으로 참여했는데, 유일한 가사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그리운 강남〉은 그 참여의 일환으로 발표한 것이라 추정된다.

김성집金聲集
1911-1959?. 함남 원산 출생으로 개성에서 송도고보를 졸업했다고 한다. 1920년대 후반 신문 학생문예란에 이름이 보이나, 같은 사람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1935년부터 대중가요 가사를 썼으며, 1940년을 전후한 시기 빅타레코드에서 대표적인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광복 이후 고향 원산의 신문사에서 근무하다가 월남했다고 하며, 1958년에 개봉한 영화 〈콩쥐팥쥐〉에서 각본을 담당했다. 1959년에 병사한 것으로 전한다.
1935년 〈콧노래〉
1936년 〈뽕 따러 가세〉 〈애상의 포구〉
1937년 〈노들강 초록물〉 〈물새야 울지 마라〉
1938년 〈돌아라 물레야〉
1939년 〈술취한 진서방〉 〈정어리타령〉 〈눈깔 먼 노다지〉 〈꼴망태 아리랑〉
1940년 〈장모님전 항의〉 〈마도로스 일기〉 〈두견아 울지 마라〉
1941년 〈원춘보〉

김억金億·김안서金岸曙·김포몽金浦夢
1893-?. 평북 정주 출생.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다. 오산중학을 졸업한 뒤 일본 게이오慶應의숙義塾을 다니다 중퇴했다. 귀국한 뒤에는 오산중학, 숭덕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가 펴낸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년)와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년)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최초’로서 의미가 있다. 동아일보사와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기도 했고, 1933년부터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했다. 1942년까지 여러 음반회사를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나, 발표한 수에 비해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곡은 그리 많지 않다. 시와 마찬가지로 가사에서도 민요적인 정서와 형식을 갖춘 작풍이 두드러졌다. 6.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1958년까지 북한에서 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있었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1933년 〈뜨내기 인생〉 〈수부의 노래〉 〈삼수갑산〉 〈아서라 이 여성아〉 〈눈물에 지는 꽃〉
1934년 〈이 잔을 들고〉 〈배따라기〉 〈홍루원〉 〈꽃을 잡고〉 〈능라도타령〉 〈탄식하는 실버들〉 〈옛 님을 그리면서〉
1935년 〈사절가〉 〈옛 생각〉 〈수부의 탄식〉 〈풀 길 없는 심사〉
1936년 〈두 사람의 사랑은〉 〈월야의 안성〉 〈이도령의 노래〉 〈천리원정〉
1937년 〈동해금강〉 〈추석노래〉 〈정의의 행진〉 〈즐거운 청춘〉
1938년 〈종군간호부의 노래〉 〈무정〉 〈영채의 노래〉 〈초로인생〉
1940년 〈동로방천〉 〈약산동대〉
1942년 〈대지의 아들〉

김영수金永壽·남해림南海林
1911-1977. 서울 출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다니다 중퇴하고, 한때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1933년 일본 도쿄에서 조직된 학생예술극장에 참여했으며,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광풍〉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맥〉이 당선되었다. 이후 동양극장 소속으로 대중적인 희곡을 쓰는 한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9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40년 이후에는 영화, 방송극에도 관여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1930년대 중반 콜럼비아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하던 조금자趙錦子와 결혼했다. 해방 후에는 희곡, 방송극, 영화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희곡 〈혈맥〉, 방송극 〈박서방〉〈거북이〉, 영화시나리오 〈성벽을 뚫고〉 등 중요한 작품을 남겼다.
1939년 〈나그네 황혼〉 〈항구야화〉
1940년 〈비 오는 부두〉 〈원정 삼천리〉
1941년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연평바다로〉
1942년 〈아리숭고개〉
1948년 〈사나이의 길〉 〈불사른 일기장〉

김영일金英一
1914-1986. 서울 출생. 본명은 김영수金榮洙이며 불사조不死鳥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1936년에 일본 니혼日本대학에 입학했다가 얼마 되지 않아 중퇴하고 돌아온 뒤, 1939년부터 태평레코드에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로도 꾸준히 작사활동을 했고, 1960년대에는 톱싱거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으나 1965년 무렵 그만두었다.
1939년 〈사망의 애상곡〉
1940년 〈불효자는 웁니다〉 〈남포불 역사〉 〈세세년년〉
1941년 〈황하다방〉 〈오동잎 맹서〉 〈상사의 월야〉 〈포경선 수기〉 〈기타줄 하소〉 〈눈 오는 백무선〉 〈도라지 낭낭〉 〈궁초댕기〉 〈북지행 삼등실〉
1942년 〈찔레꽃〉 〈명사백리〉
1943년 〈무명초 항구〉 〈이동극단 아가씨〉
1949년 〈푸른 언덕〉
1960년 〈댄서의 순정〉 〈이별의 김포비행장〉
1960년대 〈김치깍두기〉 〈노랫가락 차차차〉

김용호金用浩
1908-1967. 오케레코드 전속악단인 CMC악단의 트롬본 주자로 활동하며 가사와 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
1937년 〈북국의 외로운 손〉
1938년 〈풍년송〉 〈눈물 젖은 두만강〉 〈망향가〉 〈창랑에 지는 꽃〉 〈미소의 코스〉
1939년 〈싱싱싱〉 〈달 없는 항로〉 〈이역에 우는 사나이〉
1940년 〈청춘하이킹〉 〈선부의 아내〉 〈명랑한 부부〉
1941년 〈남의 다리를 긁다가〉

김진문金振門
생몰년 미상. 제주 출생. 주로 극작가로 활동하여 태양극장, 금희좌 등 극단 소속으로 있었으나, 자세한 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시에론, 태평, 오케레코드 등에서 가사를 발표했다.
1933년 〈청춘이 감이로다〉
1934년 〈월야의 정한〉 〈아 마시어라〉
1935년 〈꿈길〉
1938년 〈왕서방 연서〉 〈장전 바닷가〉
1941년 〈울고 간 기차〉

무적인霧笛人
1919-1960. 경남 진주 출생. 본명은 이삼동李三同이며 무적인 외에 주로 이재호李在鎬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진주고보를 졸업한 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서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나 경제적인 문제로 그만두고 돌아왔다. 1938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준準전속작곡가로 대중가요 작곡을 시작하여, 1939년부터 태평레코드 전속으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발표했다. 광복 이후에는 고향 진주에서 잠시 음악교사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대중가요 작곡을 계속해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전속작곡가로 활동했다. 작사를 전문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자신이 작곡한 곡에 직접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폐결핵을 앓아 폐 한 쪽을 잘라내기도 했으나, 결국 병으로 타계했다.
1939년 〈항구의 연서〉
1940년 〈남강의 추억〉
1956년 〈한 많은 아리랑〉
1957년 〈돌아오지 않는 그 배〉 〈불효자의 하소〉 〈사나이 눈물〉 〈울어라 기타줄〉
1958년 〈꿈의 블루스〉

문수일文秀一
1896-?. 함경도 출생. 1910년대 말에 연극계에서 입문하여 배우로 활동했고, 1930년대에는 극단행정에도 관여해 연극사, 민중극단, 연극시장 등 극단을 이끌었다. 배우로서 영화에도 다수 출연하여, 1923년 〈월하의 맹세〉, 1925년 〈놀부흥부〉, 1935년 〈아리랑고개〉, 1936년 〈장화홍련전〉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이 연극에 투신했는데, 특히 딸 문예봉은 광복 이전 최고의 여배우로 꼽힌다. 문수일이 작사한 작품은 〈세 동무〉 한 곡이 유일하다.

문일석文一石
생몰년 미상. 이력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오케레코드를 통해 가사 약간을 발표했다는 것, 그리고 목포 출생인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목포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 정도가 문일석에 관해 확인할 수 있는 전부이다. 문일석이 사실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설이 예전부터 몇 가지 제기된 바 있으나, 널리 인정받을 만한 증거가 제시된 경우는 아직 없다.
1935년 〈목포의 눈물〉
1938년 〈사나이 걷는 길〉
1939년 〈목포의 추억〉 〈향수의 휘파람〉 〈뒷골목 청춘〉
1940년 〈그 여자의 눈물〉
1941년 〈가로등 일기〉

박영호朴英鎬·처녀림處女林
?-1952. 함남 원산 출생. 최창호의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평양출판사, 1997)에서는 1911년에 강원 통천에서 출생하여 원산에서 성장했다고 서술했다. 1926년 1월 《동아일보》에 게재된 동요 〈달아〉의 작자가 바로 박영호인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연극에 참여한 것으로 전하며,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 연극시장 등 극단에서 대중적인 희곡을 많이 썼다. 극작을 하는 동시에 신문, 잡지를 통해 연극 이론과 비평을 활발하게 발표했으며, 동양극장 전속작가로 활동하다가 1939년에는 극단 고협에 가입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2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처녀림이라는 필명은 1937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음반회사에서 두루 작품을 썼으며, 시에론레코드와 태평레코드에서는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1930년대의 대표적인 대중극 작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일제 말기에는 전시체제에 협조적인 작품을 쓰고 어용 문화단체에 가입해 활동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했으며, 이후 사회주의적 성향이 뚜렷이 드러나는 행적을 보이다 1946년에 월북했다. 월북 이후 북한 연극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하며, 6.25전쟁 중에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고도 한다. 박영호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3년에 전사했다는 설도 있으나(최창호), 1952년에 병사했다는 설이 보다 유력해 보인다(정상진,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지식산업사, 2005). 박영호는 조명암과 함께 광복 이전 대중가요 작사가로서 쌍벽을 이루었는데, 오랜 동안 음반회사 문예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위상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다. 현재 법적으로는 조명암의 필명으로 간주되고 있는 김다인이 박영호의 필명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조명암이 김다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증거는 확실하지만(아래 조명암 대목 참조) 박영호가 김다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비슷한 수준의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작풍이나 몇몇 증언을 고려해 볼 때 박영호도 김다인 필명을 사용했을 것이란 추정이 정황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그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1932년 〈세기말의 노래〉 〈조선행진곡〉
1934년 〈빛나는 조선〉 〈신상사타령〉 〈정염의 휘파람〉
1935년 〈청사홍사〉 〈돈바람 분다〉 〈애상의 썰매〉 〈봄타령〉 〈정한의 밤차〉 〈들국화〉 〈황금광 조선〉 〈낙화삼천〉 〈해금강타령〉 〈서반아연가〉
1936년 〈불 꺼진 항구〉 〈꽃서울〉 〈명랑한 젊은 날〉 〈알아 달라우요〉 〈밀월의 대동 강〉 〈고향은 눈물이냐〉 〈사나이 스물다섯〉 〈청춘해협〉 〈단풍제〉 〈청춘쌍곡선〉 〈감격의 그날〉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 〈범벅서울〉
1937년 〈당신은 깍쟁이야요〉 〈짝사랑〉 〈흑장미〉 〈눈물의 사막길〉 〈연락선은 떠난다〉 〈천리춘색〉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 〈야루강 천리〉 〈인생극장〉 〈고향은 부른다〉 〈아 글쎄 어쩌면〉 〈처녀일기〉 〈캠핑전선〉 〈연애함대〉 〈상여금만 타면〉 〈불망의 글자〉 〈아가씨 운명〉 〈요 핑계 조 핑계〉 〈눈물의 경부선〉 〈청춘극장〉 〈서커스걸〉
1938년 〈전화일기〉 〈마지막 혈시〉 〈선술집 풍경〉 〈내 채찍에 내가 맞았소〉 〈봄사건〉 〈청춘빌딩〉 〈우리는 멋쟁이〉 〈뱃사공이 좋아〉 〈청춘계급〉 〈신혼 아카스키〉 〈선창에 울러 왔다〉 〈찻집 아가씨〉 〈세월을 등지고〉 〈시큰둥 야시〉 〈모던 기생점고〉 〈눈물의 국경〉 〈항구에서 항구로〉 〈덩덕궁타령〉 〈오빠는 풍각쟁이〉 〈열정의 블루스〉 〈항구의 처녀설〉 〈마누라 대문 열어〉
1939년 〈희망의 블루스〉 〈항구의 블루스〉 〈국경특급〉 〈기타에 울음 실어〉 〈북국 오천킬로〉 〈유랑극단〉 〈백두산 바라보고〉 〈봄신문〉 〈막간아가씨〉 〈상선보이〉 〈복조리타령〉 〈은어알처녀〉 〈메리켕 항구〉 〈필둥 말둥〉 〈마도로수 수기〉
1940년 〈눈물의 백년화〉 〈반달 뜨는 밤〉 〈울어라 문풍지〉 〈흘겨본 과거몽〉 〈오카리나 극장〉 〈한 잔에 한 잔 사랑〉 〈꿈꾸는 항구선〉 〈하물선 사랑〉 〈그네줄 상처〉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그림자 고향〉 〈오동동극단〉 〈갈매기 쌍쌍〉
1941년 〈아리랑 낭낭〉 〈만포선 길손〉 〈포곡새 천지〉 〈망향초 사랑〉 〈허허바다〉 〈고향길 부모길〉 〈마도로스 박〉 〈청춘해안〉 〈석유등 길손〉 〈봉화대의 밤〉 〈간도선〉 〈직녀성〉 〈고향 만리 사랑 만리〉 〈쌍돛대 탄식〉
1942년 〈민초합창〉 〈사랑〉 〈할미꽃 아리랑〉 〈화촉동방〉 〈생산항구〉 〈북청물장수〉 〈아들의 최후〉
1943년 〈서주 소식〉 〈부녀계도〉 〈천리전장〉 〈아주까리 선창〉

반야월半夜月
1917-. 경남 마산 출생. 본명은 박창오朴昌吾이며, 진해농산학교를 다니다 중퇴했다. 1939년에 태평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하면서 진방남秦芳男이라는 예명을 썼고, 1942년에 작사를 시작하면서 반야월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월북작사가의 작품을 개사할 때 추미림秋美林, 박남포朴南浦 등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수와 작사가로 활동하는 한편, 광복 이후에는 남대문악극단을 창설해 운영하고 마산방송국 문예부장을 지내면서 악극, 방송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6.25전쟁 이전에는 작사가로서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했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첫손에 꼽히는 대중가요 작사가로 활동했다. 그밖에 1956년에 대한레코드작가협회를 창설하고 1964년에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창설하는 등, 다양한 대중음악 관련 단체에서 행정적 업무를 주관하기도 했다. 광복 이전보다는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평가할 수 있다.
1942년 〈일억 총진군〉 〈넋두리 이십 년〉 〈꽃마차〉
1943년 〈용마차〉 〈국경의 여인숙〉
1948년 〈울고 넘는 박달재〉
1956년 〈금수강산에 백화가 만발하구나〉 〈나는 사람이 아니외다〉 〈애정원정〉
1957년 〈나포리 연가〉 〈낭자의 눈물〉 〈눈물진 봄아가씨〉 〈다정도 병이런가〉 〈단장의 미아리고개〉 〈무정열차〉 〈목숨을 걸어 놓고〉 〈산유화〉 〈산장의 여인〉 〈어린 결심〉 〈여수야화〉 〈오 이 나라 나이팅겔 이효정님〉 〈이차돈의 죽음〉 〈아낙네맘보〉 〈인생은 나그네〉 〈작별〉 〈가거라 슬픔이여〉 〈재수와 분이의 노래〉 〈호수의 처녀〉 〈정순의 노래〉
1958년 〈남성 넘버원〉 〈노래하는 부부〉 〈딸 칠형제〉 〈오부자의 노래〉 〈인생은 고해련가〉 〈인생수첩〉 〈초가고향〉 〈푸른 꿈이여 지금 어데〉
1959년 〈가는 봄 오는 봄〉 〈눈물의 압록강〉 〈유정천리〉
1950년대 〈고향친구〉 〈기타 소릴 듣나요〉 〈내 고향 해남도〉 〈님 무덤 앞에〉 〈다방 아가씨〉 〈삼등인생〉 〈만리포 사랑〉 〈무너진 사랑탑〉 〈비 내리는 삼랑진〉 〈뽕 따러 가 세〉 〈야래향〉 〈울리는 경부선〉 〈한 많은 누님〉 〈한양낭군〉 〈사랑은 즐거운 스윙〉
1960년 〈사백 환의 인생비극〉 〈청춘 부라보〉
1961년 〈눈감아 드리오리〉 〈마도로스 초년병〉 〈사월의 깃발〉 〈열아홉 순정〉 〈유정무정〉 〈어머니는 안 울련다〉 〈지평선〉
1962년 〈외나무 다리〉
1963년 〈사랑의 메아리〉 〈외아들〉 〈햇빛 없는 그림자〉 〈피리 불던 모녀고개〉 〈두형이를 돌려줘요〉
1964년 〈우중의 여인〉 〈두메산골〉
1965년 〈무정한 그 사람〉 〈삼천포 아가씨〉
1966년 〈기타소야곡〉 〈아빠의 청춘〉 〈월남의 달밤〉
1967년 〈유달산아 말해 다오〉
1960년대 〈잘했군 잘했어〉 〈진정이라면〉
1970년 〈일자상서〉

서수미례徐秀美禮
생몰년 미상. 1928년 5월에 열린 채규엽 독창회에 찬조출연하고 1930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봄노래 부르자〉를 작사했다는 것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송효단宋孝端
생몰년 미상. 1934년 당시 황해도 해주에 거주하며 오케레코드 경성지점 1주년 기념 현상공모 특선작으로 1934년에 발매된 〈불망곡〉을 작사했다는 것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신불출申不出
1908?-1976?. 서울 출생. 본명은 신흥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개성에서 성장해 한영서원(송도고보의 전신)을 다녔다.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지내다가 돌아와 연극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1930년대 초에 연극사, 신무대, 취성좌, 문외극단 등에서 활동한 흔적이 보인다. 1932년경부터 잡지에 시문을 발표하기도 했고, 1933년에 음반에 담아 발표한 〈익살맞은 대머리〉(일명 〈공산명월〉)가 크게 인기를 끌면서 만담의 일인자로 자리를 굳혔다. 만담가로 활동하는 동안 대중가요 가사를 쓰기 시작하여, 다작을 하지는 않았으나 기억할 만한 작품을 다소 남겼다. 광복 이후 1946년 6월에 이른바 ‘태극기 모독 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뒤 월북했다. 월북 이후에도 만담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아 한동안 활동했으나, 1960년대에 숙청된 것으로 전한다.
1933년 〈장한가〉, 〈횃불을 높여라〉
1934년 〈노들강변〉
1935년 〈나는 몰라요〉
1936년 〈아버지는 어데로〉

오준희吳俊熙
생몰년 미상. 1943년에 빅타레코드에서 발매된 〈대동강 달밤〉을 작사한 것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왕평王平·편월片月
1908?-1940. 경북 영천 출생. 본명은 이응호李應浩이며, 이두희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 배재중학을 졸업한 뒤 서울 YMCA에서 영어를 배우다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가 연기 수업을 받았다. 이후 조선연극사 등에서 활동했으나, 연기보다는 극작에 더 주력했고, 1932년에는 포리돌레코드 조선지점 설립에 관여하여 문예부장을 맡았다. 이후 주로 포리돌레코드에서 가사를 발표했고, 1938년에 성봉영화원에 참여하여 〈나그네〉, 〈군용열차〉 등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40년에 강계에서 공연하는 도중 무대 위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1941년에 그를 애도하는 노래 〈오호라 왕평〉(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남인수 노래)이 발표되었다.
1932년 〈님 그리워 타는 가슴〉 〈황성의 적〉
1933년 〈째즈의 멜로디〉 〈항구의 일야〉
1934년 〈청춘을 찾아서〉 〈사공의 설움〉
1935년 〈울기는 왜 우나요〉 〈국경의 밤〉 〈무정세월〉 〈원앙가〉 〈부두의 연가〉 〈사랑가〉
1936년 〈마누라타령〉 〈조선팔경가〉 〈애원곡〉 〈신닐니리〉 〈마도로스의 노래〉 〈능수버들〉 〈산간처녀〉 〈안개 낀 섬〉
1937년 〈스물여덟의 가을〉 〈신담바구〉 〈얄미운 아가씨〉 〈사월남풍〉
1938년 〈잊으리 그 옛날을〉
1940년 〈마음의 연가〉

유도순劉道順·범오凡吾·서두성徐斗成
1902?-?. 평안북도 출생. 1904년에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10대 후반에는 평북 영변에 거주하며 김억에게 시를 배웠다. 일본에 유학을 가 니혼日本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전하며, 《매일신보》 등에서 한동안 신문기자로 활동했다. 1921년 《동아일보》 독자투고에 〈기억의 황금탑〉이라는 시를 발표했으며, 1923년 《동아일보》 1천호기념 현상모집에 동요 〈봄〉이 당선되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1926년에 시집 《혈흔의 묵화》를 냈고, 1930년대 중반까지 여러 잡지, 신문을 통해 시문을 발표했다. 전통적이고 향토적인 정서를 주로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며, 아동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4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1930년대 중반 신민요 번성에 많은 공헌을 했다. 현재 1938년에 사망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1942년에 〈통군정노래〉가 발표될 당시까지 생존해 있었고 광복 이후에는 이렇다할 행적이 보이지 않으므로, 1940년대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두성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1935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시들은 청춘〉, 〈순풍에 돛 달고〉를 작사한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부풍은 《한국가요전집》(세광출판사, 1980)에서 서두성이 곧 유도순이라고 표현했다.
1934년 〈희망의 북소리〉 〈봉자의 노래〉 〈군밤타령〉 〈진달래의 애심곡〉 〈처녀총각〉 〈실연의 노래〉 〈처녀사냥〉 〈개나리고개〉 〈금강산이 좋을시고〉 〈조선타령〉 〈풍년맞이〉
1935년 〈울릉도타령〉 〈피지 못한 꿈〉 〈청춘타령〉 〈아득한 천리 길〉 〈서울명물〉 〈녹슬은 비녀〉 〈직부가〉 〈황야의 고객〉
1936년 〈낙화암의 천년몽〉 〈희망의 종이 운다〉 〈두 목숨의 저승길〉 〈다이나〉 〈유쾌한 시골영감〉
1937년 〈명물남녀〉
1938년 〈봄총각 봄처녀〉
1939년 〈국경의 등불〉 〈국경의 부두〉 〈아들의 하소〉 〈애련화〉 〈조선의 명산〉 〈일자일루〉 〈낭낭공주〉
1940년 〈압록강 뗏목노래〉 〈제삼 유랑극단〉
1942년 〈잘있거라 인풍루〉 〈뗏목 이천 리〉 〈통군정노래〉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서울 출생. 양정고보와 일본 조치上智대학을 졸업했다.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을 통해 아동문학을 시작하여, 1932년 《윤석중동요집》 발간 이후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어린이》, 《소년》 등 잡지 주간을 지냈고, 1956년에 새싹회를 만들기도 했다. 아동문학가로 활동하면서 대중가요 가사를 쓰게 된 경위는 분명하지 않으나, 오케레코드를 통해 발표한 작품 세 편이 현재 확인되고 있다.
1934년 〈봄맞이〉
1938년 〈외로운 아가씨〉

윤영우尹榮祐
생몰년 미상. 1933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발매된 〈청춘의 밤〉, 〈새 희망〉, 〈워띄부싱〉, 〈연밥 따는 아가씨〉 등 네 곡을 작사, 작곡한 것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을파소乙巴素
1915-1944?. 함북 명천 출생. 본명은 김종한金鍾漢이며, 1916년에 출생해 1946년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경성鏡城고보를 졸업했고, 일본 니혼日本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전한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으나, 그에 앞서 1934년에는 잡지 《별건곤》에서 주최한 유행가 가사 현상모집에 응모한 가사 〈임자 없는 나룻배〉가 당선되기도 했다. 창작, 비평, 번역 등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대중가요 가사는 그렇게 많이 발표한 편이 아니다. 1937년에 《조선일보》를 통해 발표한 〈신민요의 정신과 형태〉는 신민요에 관한 당대의 중요한 논설로 꼽힌다.
1934년 〈임자 없는 나룻배〉
1936년 〈눈물의 부두〉
1937년 〈가벼운 인조견을〉
1938년 〈야루강 처녀〉
1939년 〈천만에 말씀이오〉
1943년 〈의주에 님을 두고〉

이광수李光洙
1892-1950. 평북 정주 출생. 한학을 배우다 1905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경제적인 문제로 일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 메이지明治학원에서 수학했다. 1910년에 귀국하여 고향에서 오산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15년에 다시 와세다早稻田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1917년에 소설 〈무정〉을 발표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1919년에는 도쿄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창간을 주도했다. 1921년에 귀국한 뒤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하며 많은 소설을 발표해 당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37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시 투옥되었으며, 1939년에 조선문인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친일적인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에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곧 이어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되어 병사했다. 이광수는 1929년에 가요정화를 목표로 창립된 조선가요협회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대중가요 작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그의 가사 작품은 확인되는 것이 단 몇 곡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원래 대중가요 가사로 발표할 의도로 창작되었는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1926년 〈낙화암〉
1932년 〈스러진 젊은 꿈〉
1933년 〈오동꽃〉

이규송李圭松
생몰년 미상. 1931년에 〈방랑가〉, 〈베니스의 노래〉, 〈오동나무〉를 작사한 것 말고는 행적이나 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이부풍李扶風·이노홍李蘆鴻·노다지盧多之·화산월華山月
1914-1982. 충남 부여 출생. 충북 청주 출생이라는 설도 있다. 본명은 박노홍朴魯洪이며, 대중가요 작사에 이사라李史羅, 강영숙姜英淑 등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하며, 돌아와서는 청주에서 생활했다. 193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봄빛〉으로 3등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고, 1935년에는 역시 《동아일보》에 소설 〈빈부기貧婦記〉를 발표했다. 그밖에 잡지 《제일선》, 《조선일보》 등을 통해서도 시문을 발표했으며, 이고려李高麗라는 필명을 사용하기도 한 것으로 전한다. 1937년부터 대중가요 작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전속작사가로 있었던 빅타레코드에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악극 창작에 주력하여 반도가극단, 라미라가극단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광복 이후 1950년대에는 악극 활동을 하는 동시에 제작, 시나리오 집필 등 영화에 관여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오랜 은둔생활을 하다가 만년인 1970년대 말에 악극, 극장, 대중가요 역사를 정리한 글을 발표했고 《한국가요전집》(세광출판사, 1980) 해설 〈한국가요사〉 등을 남겼다.
1937년 〈사랑은 소곤소곤〉 〈날 두고 진정 참말〉 〈유랑의 나그네〉 〈마도로스의 노래〉 〈해조곡〉 〈청춘부대〉
1938년 〈애수의 소야곡〉 〈둥글둥글 내 사랑〉 〈왜 못 오시나〉 〈서울의 지붕 밑〉 〈지구는 돈다〉 〈아이고나 요 맹꽁〉 〈나는 열일곱 살〉 〈닐니리 새타령〉 〈여창에 기대어〉 〈얄궂은 운명〉 〈망향의 가을밤〉 〈눅거리 음식점〉 〈장모님전상서〉
1939년 〈추억의 두만강〉 〈안 오시나요〉 〈날나리 바람〉 〈외로운 가로등〉 〈추억의 탱고〉 〈가거라 청색차〉 〈깨어진 단심〉 〈전원이중주〉 〈원춘사〉 〈만포선 천리 길〉 〈낙화유수 호텔〉 〈새모리〉
1940년 〈심봉사의 탄식〉 〈춘향의 노래〉 〈눈물의 오리정〉 〈아리랑 술집〉 〈불원천리 내가 왔소〉
1941년 〈딸도 괜찮아〉 〈흘러간 화장초〉
1942년 〈꽃피는 국경선〉 〈분홍 저고리〉
1943년 〈대장군고개〉
1948년 〈가거라 삼팔선〉
1949년 〈순정의 곡〉
1955년 〈백마야 울지 마라〉
1958년 〈두 남매〉

이서구李瑞求·이고범李孤帆
1899-1981. 경기 시흥 출생. 이고범 외에 이춘풍李春風, 이외돛 등의 필명도 사용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기자로 활동했으며, 일본으로 유학가서 니혼日本대학을 다니다가 1923년에 다른 동인들과 함께 신극단체 토월회를 조직했다. 기자, 극작가로 활동하는 한편, 신문이나 잡지에 다양한 시문을 발표하고 영화와 방송에도 관여하여, 동시에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대중가요 가사는 1931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일제 말기까지 여러 음반회사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933년 무렵 시에론레코드 문예부장에 취임했고, 이후 태평레코드로 옮겨 역시 문예부장을 맡았다. 1930년대 후반에는 주로 극작가로 활동했는데, 동양극장 전속작가로 있으면서 쓴 〈어머니의 힘〉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더불어 이른바 ‘고등신파’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제 말기에는 어용 문화단체인 조선연극문화협회 이사장을 맡았고, 광복 이후에는 서울시 공보실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는 방송극에 주력하여 〈강화도령〉, 〈장희빈〉 등으로 많은 인기를 모았다.
1931년 〈젊은이의 노래〉
1932년 〈동백꽃〉 〈갈대꽃〉 〈한양의 사계〉 〈신아리랑〉
1933년 〈남대문타령〉 〈변조아리랑〉 〈울산 큰애기〉 〈모던 아리랑〉 〈처녀 십팔세〉
1934년 〈금강산타령〉 〈버리지 말아요〉 〈신농부가〉 〈서울타령〉 〈영감타령〉 〈숲사이 물방아〉 〈단풍타령〉 〈야속한 꿈길〉
1935년 〈하아킹의 노래〉 〈가을의 종로〉 〈넋두리 아리랑〉
1936년 〈마라손왕〉 〈어이나 할 것인가〉 〈좋지 좋아〉
1937년 〈버들잎 하나〉 〈달려라 노새야〉
1939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홍도야 울지 마라〉 〈광동아가씨〉 〈제2유랑극단〉
1940년 〈그대여 왜 우는가〉 〈봄은 청춘의 향기다〉 〈황포강 이슬〉 〈오호라 김옥균〉
1941년 〈방앗간 아가씨〉 〈흰 돛대〉 〈낙화춘풍〉
1942년 〈동백 아가씨〉
1954년 〈슈샨보이〉
1960년 〈강화도령〉
1961년 〈장희빈〉

이원형李元亨
생몰년 미상. 함남 덕원에 거주하며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유행가 부문에 〈두만강 뱃사공〉이 당선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행적이나 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이창근李昌根
1908-?. 1931년에 개봉한 영화 〈산괴령〉 감독을 시작으로 1960년대 말까지 감독, 제작, 촬영 등 영화의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대중가요 작사로는 직접 감독한 작품 〈처의 면영〉 주제가 가사를 쓴 것이 유일하다. 1980년 당시 생존해 있었던 것은 분명하나 이후 사망 여부와 시기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하윤異河潤
1906-1974. 강원 이천 출생. 대중가요 작사에는 김백오金白烏, 김열운金悅雲, 천우학千羽鶴 등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1926년 일본 호세이法政대학 재학중에 《시대일보》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했다. 1929년에 귀국한 이후 1930년부터 중외일보사, 경성방송국 등에 근무했으며, 1934년 무렵부터 대중가요 가사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콜럼비아레코드 문예부장을 지냈고, 이후에는 《동아일보》 기자, 서울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시인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창작보다는 번역에서 더 평가를 받았고, 시인보다는 영문학자나 수필가로 더 기억되고 있기도 하다. 대중가요 가사에서도 다작을 하기는 했으나 유명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작품보다는 신문, 잡지를 통해 발표한 대중가요 관련 비평, 논설이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있고, 1939년에 간행한 시가집 《물레방아》에 수록한 가사 모음집 〈가요시초歌謠詩抄〉에서 ‘가요시’라는 명칭을 공식화한 것이 주목받고 있다.
1934년 〈조선타령〉 〈섬색시〉 〈가슴만 타지요〉 〈애상곡〉 〈종로행진곡〉
1935년 〈고도의 탄식〉 〈단장원〉 〈고향 잃은 갈매기〉
1936년 〈고향에 님을 두고〉 〈동무의 추억〉 〈애수의 해변〉 〈물새야 왜 우느냐〉 〈광야의 달밤〉 〈이태리의 정원〉 〈향수의 무희〉 〈이별의 눈물〉 〈첫사랑의 꿈〉
1937년 〈잊지는 않으시겠죠〉 〈만주의 달〉 〈광야의 황혼〉 〈북방소식〉 〈단장애곡〉 〈낙동강의 애상곡〉 〈총후의 기원〉 〈수일과 순애〉
1938년 〈승전의 쾌보〉 〈항구는 슬퍼요〉
1939년 〈동트는 대지〉 〈청춘마차〉
1941년 〈포구의 여자〉

이현경李賢卿
생몰년 미상. 경기 개성 출생. 본명은 이기세李基世이며, 일본에서 유학하는 도중 연극을 접하게 되어 귀국한 뒤 1912년에 극단 유일단을 조직했다. 이후 예성좌, 문예단 등 극단을 조직해 1910년대 신파극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극단 조직은 물론 극본, 연출, 연기 등 연극 관련 거의 모든 분야를 직접 맡아 주도했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영화, 음반 분야에서도 활동하여, 1920년에 영화 〈장한몽〉을 제작, 감독했으며, 1925년부터 음반을 내기 시작한 일동레코드에서 음반 기획을 담당하기도 했다. 직접 축음기상회를 운영하며 1932년부터 빅타레코드를 통해 대중가요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1934년에는 빅타레코드 문예부장에 취임했다. 문예부장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홍난파를 영입해 나소운羅素雲이라는 필명으로 대중가요를 작곡하게 하기도 했다. 영화와 연극 분야에서도 계속 활동하여, 1935년에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 원작을 썼고, 1937년에는 영화 〈심청전〉의 기획, 각색을 담당했다. 1939년에는 《동아일보》 주최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32년 〈영객〉 〈고요한 장안〉 〈서울행진곡〉 〈상사타령〉
1933년 〈덧없는 봄빛〉
1935년 〈정다운 평양〉
1936년 〈십장가〉 〈낙동강 칠백 리〉

임서방任曙昉
1906년-?. 함남 원산 출생. 일찍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요도바시淀橋연극연구소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고향 원산으로 돌아와 극단 산양회山羊會를 조직했다. 이어 조선극회(도쿄 소재), 연극사, 연극시장, 신무대 등 극단에서 활동했다. 주로 각본을 썼으나 배우로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다. 연극활동을 하는 가운데 간간이 가사를 써서 발표했고, 1940년에 결성된 반도악극좌에도 참여했다.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전한다.
1934년 〈월야의 탄식〉 〈꽃이 피면〉
1939년 〈북방여로〉 〈주릿대치마〉
1940년 〈선창의 블루스〉

장재성張在星
생몰년 미상. 1936년에 발매된 〈환락의 밤〉, 1937년에 발매된 〈명사십리〉를 작사한 것 외에는 그 이력이나 행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전수린全壽麟
1907-1984. 경기 개성 출생. 송도고보를 다니면서 서양인 선교사 (혹은 선교사 부인)에게 음악이론과 바이올린 연주를 배운 것으로 전한다. 192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연주, 작곡을 시작했으며 홍난파가 이끌던 연악회硏樂會에 참여했다고도 한다. 주로 빅타레코드 전속작곡가로 많은 작품을 작곡했고, 이따금 자기 작품에 직접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1970년에 한국가요작가동지회 초대회장을 지냈다.
1932년 〈에라 좋구나〉
1934년 〈무정〉
1935년 〈날 데려가오〉

조경환曺景煥
1910?-1956?. 경북 김천 출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39년 태평레코드가 재기할 당시 많은 투자를 하고 일시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본명과 고려성高麗星이라는 필명을 써서 광복 이후까지 가사를 썼다. 그의 유작을 동생인 작곡가 나화랑羅花郞(본명 조광환曺曠煥)이 탁소연卓素然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광복 이후에는 작사와 함께 창극 대본을 다수 썼다고도 한다. 1956년 무렵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기는 하지만, 그 이후에 발표된 작품도 확인되는 등 사실이 분명하지는 않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상 1960년 이전에 사망한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1939년 〈절연편지〉 〈님 찾는 발길〉
1940년 〈별루사창〉 〈어머님 사랑〉 〈비 오는 해관〉 〈나그네 설움〉 〈남양의 눈물〉 〈춘소화월〉 〈마상일기〉
1941년 〈비둘기타령〉
1942년 〈금박댕기〉
1943년 〈삼각산 손님〉
1945년 〈사대문을 열어라〉
1955년 〈비에 젖는 주막집〉 〈아네모네 탄식〉
1958년 〈고향에 찾아와도〉

조명암趙鳴岩·이가실李嘉實·김다인金茶人
1913-1993. 충남 아산 출생. 본명은 조영출趙靈出이며, 조명암·이가실·김다인 외에 김운탄金雲灘이라는 필명으로 작사를 하기도 했다. 여덟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와 어렵게 생활하다 열다섯 살 무렵 금강산 건봉사에서 출가해 승려 생활을 했다. 건봉사 부속학교를 다니다가 보성고보로 전학했고, 1932년부터 여러 신문, 잡지에 시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동방의 태양을 쏘라〉와 가사 〈서울노래〉가 뽑혀 공식적으로 시인, 작사가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에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하여 불문학을 전공했고, 1940년부터는 악극, 연극 대본을 써서 발표했다. 광복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참여했고, 이후 주로 좌익계열 문예단체에서 활동했다. 1948년에 월북한 이후 교육문화성 부상副相, 문학예술가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계속 시, 가사, 희곡 등을 발표했다. 1973년에 국기훈장을 받는 등, 다른 월북 작가들에 비해 오랜 기간 화려한 삶을 살다가 1993년에 타계했다. 조명암은 시인, 작사가, 극작가, 연출가 등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으나, 가장 중요한 영역은 대중가요 작사였다. 광복 이전에 발표된 대중가요의 1/10 이상이 조명암의 작품일 정도로 다작을 하기도 했고, 현재까지 널리 불리는 인기곡과 문학성이 뛰어난 걸작이 많아 질적으로도 다른 작가들을 압도했다. 극작 분야에서도 조선악극단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1940년대에 대표적인 악극 작가로 활동했다. 또한, 일제시대 말기와 월북 이후를 통틀어 대중가요 작사자 중 가장 권력친화적 태도를 보여온 작가이기도하다. 현재 법적으로 조명암의 필명이라 인정되고 있는 김다인에 관해서는 아직 몇 가지 논란이 있다. 〈포구의 인사〉, 〈천리정처〉, 〈낙화유수〉, 〈인생선〉 등의 경우 음반딱지와 광고에 표기된 작사자 이름으로 조명암과 김다인이 함께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김다인이 조명암의 필명은 아니라 할지라도 일부 김다인이 조명암의 필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1988년에 일본에서 발행되는 신문 《조선신보》에 조명암 자신의 명의로 연재된 〈민족의 역사와 대중가요〉에서는 김다인을 조명암의 필명으로 언급하지 않았고, 김다인이 박영호의 필명이라거나 공동으로 사용한 필명이라는 증언과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므로, 모든 김다인이 조명암의 필명이라고 단정하기 위해서는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1934년 〈서울노래〉 〈붉은 장미〉
1935년 〈추억의 소야곡〉 〈주막의 하룻밤〉 〈남포의 추억〉 〈청춘부두〉
1936년 〈황야에 해가 저물어〉 〈여로인생〉 〈금노다지타령〉
1937년 〈무정곡〉 〈눈물의 피에로〉 〈구십 리 고개〉 〈금송아지타령〉 〈울고야 떠날 길을〉 〈조선의 처녀〉
1938년 〈알뜰한 당신〉 〈한양은 천리원정〉 〈꼬집힌 풋사랑〉 〈토라진 눈물〉 〈앵화폭풍〉 〈산호빛 하소연〉 〈추억의 장한몽〉 〈청노새 탄식〉 〈총각 진정서〉 〈꽃 피는 포구〉 〈외로운 화장대〉 〈남쪽의 여수〉 〈바다의 교향시〉 〈감격의 언덕〉 〈괄세를 마오〉 〈남장미인〉 〈타향의 술집〉 〈님전상서〉 〈신접살이 풍경〉 〈울리는 만주선〉 〈항구마다 괄세더라〉 〈기로의 황혼〉 〈꼴망태 목동〉 〈님전 화풀이〉 〈개고기 주사〉 〈활동사진 강짜〉
1939년 〈눈물의 신호등〉 〈산호채찍〉 〈항구의 무명초〉 〈어머님전상백〉 〈미녀도〉 〈돈타령〉 〈모던 관상쟁이〉 〈세상은 요지경〉 〈방랑극단〉 〈복덕장사〉 〈오로라의 눈썰매〉 〈잃 어버린 아버지〉 〈파랑치마〉 〈초록색 해안선〉 〈눈물의 태평양〉 〈수박행상〉 〈삽살개타령〉 〈서울블루스〉 〈바다의 꿈〉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순정특급〉 〈담배집 처녀〉 〈나무아미타불〉 〈똥그랑땡땡〉 〈엉터리 대학생〉 〈팔도장타령〉 〈온돌야화〉
1940년 〈무정고백〉 〈울며 헤진 부산항〉 〈쓸쓸한 여관방〉 〈이름이 기생이다〉 〈북경의 달밤〉 〈화류춘몽〉 〈화륜선아 가거라〉 〈향수열차〉 〈유쾌한 봄소식〉 〈살랑춘풍〉 〈사랑은 불사조〉 〈인생 네거리〉 〈망향의 벤치〉 〈항구의 붉은 소매〉 〈울리는 백일홍〉 〈홍등일기〉 〈가거라 똑딱선〉 〈잘있거라 단발령〉 〈눈 오는 네온가〉 〈불어라 쌍고동〉 〈눈 감은 포구〉 〈마지막 글월〉 〈무너진 오작교〉 〈꿈꾸는 백마강〉
1941년 〈분 바른 청조〉 〈홍장미〉 〈역마차〉 〈진달래 시첩〉 〈해 저문 황포강〉 〈아주까리 등불〉 〈오호라 부주전〉 〈요즈음 찻집〉 〈아리랑 삼천리〉 〈홍사등 푸념〉 〈그리운 찻집〉 〈여인행로〉 〈가거라 초립동〉 〈무정천리〉 〈희망〉 〈지원병의 어머니〉 〈인생〉 〈고향〉 〈집 없는 천사〉 〈선창〉 〈인생출발〉 〈진주라 천리 길〉 〈백련홍련〉 〈비 오는 상삼봉〉 〈오호라 왕평〉 〈열일곱 낭낭〉 〈포구의 인사〉
1942년 〈그대와 나〉 〈낙화삼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병원선〉 〈경기 나그네〉 〈총후의 자장가〉 〈할빈 다방〉 〈낙화유수〉 〈남매〉 〈즐거운 상처〉 〈목포는 항구〉 〈설중화〉 〈옥루몽〉 〈서생원 일기〉 〈남쪽의 달밤〉 〈이 몸이 죽고 죽어〉 〈내 고향〉 〈사면초가〉 〈소주 뱃사공〉 〈미풍의 항구〉 〈위문편지〉 〈바다의 반평생〉 〈일사상서〉 〈행복의 마차〉 〈목화를 따며〉 〈모자상봉〉 〈누님의 사랑〉 〈군사우편〉 〈천리정처〉 〈더벅머리 과거〉 〈고향설〉 〈아주까리 수첩〉 〈인생선〉 〈청년고향〉
1943년 〈어머님 안심하소서〉 〈결사대의 아내〉 〈양산도 봄바람〉 〈남아일생〉 〈정든 땅〉 〈알성급제〉 〈황포돛대〉 〈서귀포 칠십 리〉 〈인생가두〉 〈아름다운 화원〉 〈고향소식〉 〈이천오백만 감격〉 〈혈서지원〉 〈추억의 수평선〉 〈항구의 전야〉
1946년 〈가면무도회〉
1947년 〈아내의 노래〉
1948년 〈울어라 은방울〉 〈고향초〉 〈몽고의 밤〉 〈향수마차〉

채규엽蔡奎燁
1906?-1949?. 함남 함흥 출생. 기록에 따라 1905년 또는 1907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원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다고도 하며 보성중학을 졸업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에 일본으로 건너가 성악을 공부했는데, 1927년에 도쿄에서 조선프로예술동맹 동경지부가 결성될 때 음악부장을 맡기도 했다. 1927, 8년에는 일시 귀국하여 독창회를 열었고, 1930년에는 근화여학교 음악교사로 재직했다. 1933년에 일본 주오中央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 대중가요 가수로서 1930년에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냈으며, 이후 1943년까지 오케, 태평, 포리돌레코드에서도 많은 노래를 불러 ‘유행가의 패왕’이라 불렸다. 동시에 일본에서도 음반을 발표했는데, 하세가와이치로長谷川一郞, 사하쿠슈지佐伯周二 등의 예명을 사용했다. 주로 가수로서 활동했으나, 이따금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해 몇몇 작품을 남겼다. 채규엽은 193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꼽히며 일본에서도 활동하는 등 화려한 생활을 했으나, 종종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1937년에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까지 했고, 광복 이후인 1948년에도 다시 사기 혐의로 언론에 등장했다. 일제 말기인 1943년에는 돌연 가수를 그만두고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에 지원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광복 이후 악극단을 이끌기도 하고 무대에 서기도 하다가 1949년 무렵 월북한 것으로 전한다. 남한에서는 그가 월북 이후 북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렵게 살다 죽었다는 기술이 일반적이나, 북한에서 간행된 최창호의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평양출판사, 1997)에서는 1949년 12월에 함흥에서 병사했다고 썼다.
1930년 〈유랑인의 노래〉 〈고독한 몸〉
1932년 〈북쪽으로〉

청해靑海
?-1957. 청해보다는 이운방李雲芳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3, 40년대에 많은 연극, 악극 대본을 써 중요한 대중극 작가로 활동했으나, 그밖에 다른 이력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933년 〈고도의 정한〉 〈젊은 마음〉
1936년 〈님 실은 배〉
1937년 〈달맞이〉 〈잔월초〉

콜럼비아레코드 문예부文藝部
일제시대. 음반회사 가운데 규모가 큰 곳에는 대부분 문예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거의 모든 음반회사의 본사가 일본에 있었으므로, 한국어음반을 원활하게 제작하기 위해서는 현지 기획업무를 담당하는 조선문예부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문예부 업무를 총괄하는 문예부장에는 시인이나 극작가 같은 문인이 기용되는 경우가 많아, 김능인, 박영호, 왕평, 이기세, 이서구, 이하윤 등이 모두 그러한 예였다. 콜럼비아레코드의 경우 안익조, 이하윤, 구완회 등이 문예부장을 역임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많지는 않으나 작사, 작편곡이 문예부 명의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는 실제 문예부 소속 부원들이 집단으로 작업을 한 경우도 있고 개인의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어 그렇게 표기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3년 〈꼴불견 주제가〉
1936년 〈마라손제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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