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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조선문학사(외)

1. 본서는 박영희의 〈현대조선문학사〉와 〈초창기의 문단측면사〉, 두 글로 이루어졌다. 이들 글은 대략 회월이 45년 12월 서울을 떠나 춘천의 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49년 반민특위로부터의 소환 때문에 서울로 상경할 때까지 칩거하는 동안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서에서 택한 원전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조선문학사〉는 《사상계》에 1958년 4월부터 59년 3월까지 연재된 〈현대한국문학사〉와 김윤식의 《박영희 연구》(열음사, 1989)에 부록으로 실린 〈현대조선문학사〉이다. 〈현대한국문학사〉는 《사상계》에 ‘제2절 조선적 현실의 성장과 문예운동’까지만 수록되었다. 김윤식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현대조선문학사’였으며, ‘제3절 수난기의 조선문학’ 이후의 원고는 늦게 발견되어 《박영희 연구》에 싣..
1. 본서는 박영희의 〈현대조선문학사〉와 〈초창기의 문단측면사〉, 두 글로 이루어졌다. 이들 글은 대략 회월이 45년 12월 서울을 떠나 춘천의 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49년 반민특위로부터의 소환 때문에 서울로 상경할 때까지 칩거하는 동안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서에서 택한 원전은 다음과 같다.
(1) 〈현대조선문학사〉는 《사상계》에 1958년 4월부터 59년 3월까지 연재된 〈현대한국문학사〉와 김윤식의 《박영희 연구》(열음사, 1989)에 부록으로 실린 〈현대조선문학사〉이다. 〈현대한국문학사〉는 《사상계》에 ‘제2절 조선적 현실의 성장과 문예운동’까지만 수록되었다. 김윤식에 의하면 원래 제목은 ‘현대조선문학사’였으며, ‘제3절 수난기의 조선문학’ 이후의 원고는 늦게 발견되어 《박영희 연구》에 싣는다고 밝히고 있다. 본서에서는 ‘현대조선문학사’라는 원래의 제목을 사용한다.
(2) 〈초창기의 문단측면사〉는 《현대문학》에 1959년 8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연재된 글이다.
2. 각주는 오기나 오식, 실증적 오류를 바로잡거나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수준에 엄격히 국한시켰다.
3. 본문 중 [ ]표 속에 든 주는 박영희가 원문에서 사용한 각주이다.
4. 한자는 가급적 한글로 바꾸었고,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한자를 병기하였다.
5.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맞춤법은 현재 통용되는 현대 표기법으로 바꾸었다.
6. 표준어를 기준 삼되 표준어에 없는 방언이나 속어는 그대로 살렸다. 글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준어로 고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판단된 경우에도 방언이나 속어를 그대로 살렸다.
7. 원저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쉼표를 찍어주었다.
8. ○○○는 인쇄 상태가 나빠 판독이 불가능한 글자를 수대로 표시한 것이며 , ×××는 발표 당시 검열 등의 이유로 삭제된 것을 글자 수대로 표시 한 것이다.
9. 작품명은 〈 〉로, 작품집이나 일반서책은 《 》로 구분하여 표시하였다. 기타 각종 부호도 현재 통용되는 것으로 바꾸었다.
1901년
음력 12월 20일에 서울 소공동에서 아버지 박병욱朴秉旭과 어머니 김승일金昇日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박병욱(1878~1974)은 박영희 위로 세 딸을 두었으나 모두 병으로 잃고 23세에 외아들 박영희를 얻었다. 당시 부친은 남바위나 조끼 등 털로 된 물품을 다루는 모물전毛物廛을 벌이고 있었다. 모친(1875~1964)은 부친보다 세 살 연상으로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꿋꿋한 성품으로 회월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박영희의 나이 3세 때 부친은 모불전을 정리하고 서대문구 의주로 2가로 이사했다. 이후 부친은 돈놀이를 하는 한편 파주 부근에다 농토를 사서 소지주로 살아갔다.

1912년
남대문 근처 교회에 있던 기독교 계통의 공옥소학교攻玉小學校에 입학했다. 그 전 7, 8세때부터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우기도 했다. 모친은 회월이 소학교에 입학하던 무렵 기독교에 입문, 이후 전도사 일까지 볼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가 되었다.

1916년
3월에 공옥소학교를 졸업한 뒤 4월에 배재고보培材高普에 입학했다. 배재고보 시절 회월은 김기진, 나도향과 깊은 교우 관계를 맺었다. 김기진 등과 함께 《시의 구락부》라는 팜플릿 형태의 회람 잡지를 발간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김기진 등과 함께 검거되었으나 곧 훈방되었다.

1920년
3월 초에 김기진의 권유로 졸업 시험도 안본 채 일본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로 4월 초에 귀국했다. 그리고 6월, 만 19세의 나이로 한 살 아래인 김봉업金鳳業과 결혼했다. 회월은 김봉업과의 사이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가족들의 회고에 의하면 가정에 매우 충실한 가장이었다고 한다. 절친한 친구였던 박종화는 “회월은 술도 마시지 못하였고, 더구나 방탕한 생활은 그의 기질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사람이었다. 성격은 아주 얌전하고 내성적이며 심약한 사람이었다”라고 증언하였다. 한편 6월부터 최승일이 주관한 경성 청년구락부 기관지 《신청년》에 나도향과 함께 동인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3월에 도향의 안내로 함께 월탄 박종화를 만났다. 박종화, 황석우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시전문지 《장미촌》동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장미촌》창간호에 시 〈적笛의 비곡悲曲〉, 〈과거의 왕국〉 2편을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는데, 그래서 〈적의 비곡〉은 회월의 처녀작으로 간주된다. 이 해 가을 회월은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영어 단기강습소인 동경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다. 이때 회월은 김기진과 함께 기숙하며, 영어 공부에 힘을 쏟는 한편 문학 수업에도 열중하였는데 특히 상징주의에 깊이 탐닉했다.

1922년
회월은 《백조》 창간을 준비하던 중 도일함에 따라 창간호(1922. 1), 제2호(1922. 5)는 동경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 회월은 극도의 불면증과 신경쇠약 등 건강을 해쳐 귀국하여 4, 5개월간 두문불출하고 독서 등으로 소일했다.

1923년
《백조》 제3호(1923. 9)부터 동인으로 본격 재합류하여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4년
이 해에 박영희의 사상 전환과 새로운 문학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김기진 등과 함께 〈파스큘라〉를 결성하여 계급문학운동을 서서히 일으켜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개벽사에 입사해 문예부의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1925년
2월 8일 천도교 기념관에서 파스큘라 문예강연회가 열렸다. 뒤이어 파스큘라는 젊은 좌파 문예인들의 조직이었던 염군사와의 합동을 꾀하게 되었다. 두 단체는 마침내 합동, 8월 23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카프’라 약칭)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회월은 계급문학운동의 가장 주도적인 인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26년
1월에 카프의 기관지 격인 《문예운동》 창간호가 발행되고 5월에 2호가 나오는데, 2호의 권두언을 박영희가 집필하는 등 핵심적인 활동을 했다. 12월 18일에 문예운동사가 주최하는 문예대강연회가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박영희를 비롯하여 카프 쪽 인사가 대거 출연했다. 12윌 24일에 열린 임시총회를 통해 카프는 결성 1년 반 만에 처음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박영희는 7인 위원 중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 12월, 김기진이 박영희의 소설을 혹평하면서 두 사람 간에 이른바 ‘내용 형식 논쟁’이 전개되었다.

1927년
9월 l일에 카프 임시총회가 개최되어 방향 전환과 문호 개방이 결의되고 강령과 규약이 개정되었다. 박영희는 새롭게 선출된 위원으로 임명되고, 3일 뒤에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교양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방향 전환 논의와 카프 재조직, 기관지 《예술운동》 간행 등의 사건을 통해 제3전선파, 즉 카프 동경지부 그룹이 부상하면서 이후 박영희의 지도권은 현저히 약화된다.

1930년
4월 26일에 개최된 카프 중앙집행위에서 동경 무산자사파들인 안막, 권환 등이 중앙위원으로 새로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6월경부터 각종 지면을 통해 공식적으로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를 주창했다. 9월에 《소설평론집》을 민중서원에서 발행했다.

1931년
이해 봄 무렵부터 박영희는 카프의 모든 책임을 임화 그룹에 넘겼다. 단 카프 회의가 집회 금지 상태여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5월에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박영희는 신간회 경성지회 해소위원장을 맡아 경성 지회를 해소했다. 8월에 종로에서 고등계에 피검되었다. 이어 카프 맹원들에 대한 검거가 진행되고 10월 15일에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 관련자들은 검사국으로 송국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카프 맹원들은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고 김남천만이 기소되었다. 박영희는 권환과 함께 신병으로 인한 불구속 처분을 받았다. 10월, 회월은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장·사회부장을 역임했다.

1932년
5월 16일에 열린 카프 중앙위원회에서 박영희는 김기진과 더불어 위원직을 사임했다. 조선중앙일보사에서 퇴사하여 다시 직업 없는 생활에 들어섰다.

1933년
10월 7일에 카프에서 탈퇴했다. 그러나 카프 자체가 거의 붕괴상태에 있었던 까닭에 달리 탈퇴서를 제출할 곳도 없어 이를 공개리에 천명하였다. 회월이 카프에서 전향한 이유는 첫째, 프로문학으로는 더이상의 활로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둘째, 일본의 NAPF 해체를 비롯,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매우 극심해졌다. 셋째, 카프 제1차 검거사건 이후 회월은 자신의 신변에 대한 위협을 심각하게 느꼈다. 넷째, 회월의 체질상의 한계이다. 내성적이며 심약한 그의 성격과 학자풍의 기질상 프로문학운동이 요구하는 더 이상의 투사적인 저돌성을 감당할 수 없었으며, 거기다 기독교인인 모친과 가족들의 만류도 크게 작용하였다.

1934년
1월에 이른바 “다만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이며, 상실한 것은 예술자신”이라는 유명한 전향선언문 〈최근 문예이론의 신전개와 그 경향〉을 발표하였다. 2월에 열린 카프 중앙집행위원회는 박영희의 탈퇴원을 보류시켰다. 전향선언을 하였음에도 1934년 5월에 들어서자 시작된 소위 〈신건설사新建設社〉 사건에 박영희도 연루되어 12월에 다시 검거되었다. 회월이 카프를 떠났지만, 아직도 일제에 의해 명목상의 지도자로 지목받았던 까닭이다. 일제는 신건설사 사건 자체보다는 프로문학 운동 전체에 대해 탄압의 구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5년
1월 14일에 박영희를 포함한 이른바 신건설사 사건 관계자 30여 명이 전주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국, 24일에 기소되고 25일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5월에 일제 관헌의 강압적 권유 끝에 카프 해산계가 동대문 경찰서를 경유하여 경기도 경찰부에 제출됨으로써 해산 수속이 완료되었다. 6윌 29일에 신건설사 사건 관련자 23명에 대한 예심이 종결되고 10월 28일에 전주 지법에서 1차 공판, 12원 8일에 선고가 있었다. 박영희는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풀려났다. 익년 2월에 대구 복심 법원에서의 항소심 선고 공판으로 이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때의 그의 심경을 자세히 피력한 글이 《현대문학》(1958. 7~1959. 7)에 연재된 〈독방獨房〉이다. 회월은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 어머니가 보내 준 성경책과 편지에 깊은 감화를 받고 1935년 이후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 납북 당시까지 교회에 나갔다.

1936년
이해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박영희는 평론 활동을 꾸준히 전개하는 한편 《회월시초》(1937. 5)를 간행하여 자신의 시적 활동을 정리하기도 했다.

1938년
6원 20일부터 22까지 동경 법조회관에서 열린 전향자들의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 권충일과 함께 조선 대표로 참석, 부일의 길로 들어섰다. 회월은 처음에 경성지부의 간사책이었다가 1939년 7월 15일에는 경성부내 4개 분회 중 제l분회 분회장 일을 보았다. ‘시국대응전국위원회’에서 귀국한 후 가진 경과보고회석상에서 〈사보연맹〉결성 건이 가결되었는데, 박영희는 이때 경성지부 임원이 되었다.

1939년
l월 ‘전쟁 문학과 조선 작가’란 좌담회에 참석하는데 박영희의 친일적 평론 행위는 이것이 처음인 듯하다. 4윌 15일부터 5원 13일까지 김동인, 임학수와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으로 중국 화북지방을 다녀왔다. 그 보고문으로 《전선기행》을 간행하였다. 또 8월 경부터 기획된 영화 〈지원병〉의 원작을 썼다. 안석영이 감독하고 문예봉 등이 출연한 이 영화는 1941년 3월에 개봉했다. 10월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중심적으로 참여하고 간사로 선출되었다. 11월부터 강행된 〈창씨개명령〉에 따라 회월은 방촌향도芳村香道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회월은 이후 그의 친일논문 등에 이 창씨명을 사용하였다.

1940년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결성되고 1941년 1월 문화부가 설치되었을 때, 회월은 금억·백철·유진오와 기타 일본인을 포함한 47명의 문화위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2월 25일 〈황도학회皇道學會〉가 창설되자 회월은 46명의 발기위원 중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8명의 이사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8월 12일자로 조선문인협회 간사장을 맡았다. 8월 삼천리사 주최의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에 참가하고, 니중에 이 협회가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합동하여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으로 통합·발단되었을 때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1월에 이광수, 유진오 등과 ‘제l회 대동아 문학자 대회’에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1943년
4월에 창립된 조선문인보국회의 총무국장직을 맡았다. 이상과 같은 박영회의 친일 행위에 대해 임종국은 그것이 논리를 결여하고 있음을 들어 “정신의 전향보다 행동의 전향이 앞섰고 스스로 우러난 친일 전향이 아니라 외부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있다.

1945년
8월 1일 조선문인보국회 임원개편에 따라 평론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8·15 해방 직후 서울을 떠나 춘천으로 이주했다. 12월에 춘천공립중학교 국어 교사로 발령받아 1946년 12월까지 근무했다.

1947년
〈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일원사에서 간행했다.

1948년
이 해 말경 〈현대조선문학사〉를 탈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1949년
반민특위로부터의 소환 때문에 여름에 서울로 돌아와 서울 사대, 국학대, 홍익대 등에서 국문학사 등을 강의하고 보도연맹에 가입, 선도위원으로 일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김윤식 교수는 “1988년에 북조선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회월은 1960년대에 거기서 영화 및 시나리오 창작에 관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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