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노자영이란 문학사에서 잊힌 이름에 가깝다. 《백조》 동인이자 잡지 《조광》 《여성》 등의 편집자로 기억되고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노자영의 이름을 기리는 자리는 전무하다고 해도 좋다. 간간이 노자영의 시를 ‘센티멘탈리즘의 승화’로 고평하거나 ‘겨레시’라는 이름 아래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노자영에 대한 유일한 박사논문은 이 맥락에서 나왔다― 파급 효과는 미미했다. ‘낭만적 감상주의로 일관’한 시인이라는 것이 문학사에서의 공식적인 서술이었을 따름이다. 세 권의 시집 (《처녀의 화환》 《내 혼이 불탈때》 《백공작》)과 여섯 권의 소설집(《반항》 《청춘의 광야》 《영원의 몽상》 《무한애의 금상》 《영원의 무정》 《표박의 비탄》 ― 중 절반은 감상문과 소설·시극 등을 함께 묶었다), 그리고 여섯 권의 기타 문집(《사랑의 불꽃》 《황야에 우는 소조》 《낙화유수집》 《청공세심기》 《인생안내》 《나의 화환》)과 이론·교양서(《문예창작론》 외) 등, 지금 확인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도 노자영이 남긴 저작은 적지 않으나, 그 하나하나를 훑다 보면 오히려 문학사에서의 ‘망각’을 긍정하게도 된다. 예외적인 동시 선구적이며, 반시대성을 통해 새로운 시대성을 개척하는 것이 정전正典의 요건이라면, 노자영의 문장은 이 요건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앞질러 말하자면 노자영은 부정의 정신을 갖추지 못한 작가였으며, 대중과 대결하는 대신 대중에 전적으로 의지한 문학가였다.
그러나 1920년대의 문화사에서 노자영이 차지하는 문제성은 결코 적지 않다. 일찍이 1910년대 후반부터 《기독신보》 《매일신보》 등에 문장을 발표하기 시작, 《창조》와 《백조》 《장미촌》 등에 시를 게재했다는 것이 노자영의 이름과 관련해 공식화되어 있는 기술의 거의 전부이지만, 1920년대에 노자영이라는 이름은 최고의 상품 가치를 누리고 있었다. 1923년 발간되어 “1일 평균(…) 30부 내지 40부씩이나 팔리는” 인기를 누렸다는 서간집 《사랑의 불꽃》, ‘고급 문예’로 선전되면서 도처에 입간판까지 세웠던 소설 《반항》, 출간 3개월 만에 판매부수 1천부, 인세 수입 6백원을 기록한 문집 《영원애의 몽상》 등, 노자영의 이름을 내건 책은 1920년대 초·중반에 놀라운 기세로 팔렸다. 판매부수만 올렸던 것이 아니다. 시인 모윤숙의 회고에 따르면 노자영의 문학작품은 이광수의 소설, 김억과 김동환의 시와 더불어 문학에 대한 열정을 키워낸 최초의 텍스트 중 하나였다고 한다. 1930년대 초반 월간 《삼천리》의 ‘여기자’― 아마도 최정희가 고백하였듯 “어릴 적에 씨의 작품을 몹시 애독하였으며 따라서 씨를 숭배한” 문학소년·소녀가 한둘이 아니었으며, 그 영향의 범위는 후일 정식 작가로 등단한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몇 년 후 노자영을 가혹하게 비판한 조중곤 역시 출간 당시에는 《반항》을 세 번이나 독파했다고 한다. 문학 지망생들에게 있어 노자영은 입문 시기에 거치는 작가들 중 하나였다. 대중적으로는 1920년대 초반 ‘문학’을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연애’에의 열망을 상징하는 부호이기도 했다.
1900년(1세)
황해도 송화군 상리면 양지리에서 출생. 노자영의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1898~1901년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1919년 당시 20세, 1936년의 수필에서는 ‘36년의 생애’라 했고 1937년 1월의 설문 응답에서 38세라 한 것으로 보아 1900년 생으로 잠정暫定해 둘 수 있을 듯하다. 1940년에 39세라 답한 기록이 있는 것은 만 나이를 뜻한 것으로 추정해 둔다. 이후 ‘10세 전후의 소년 시대’에는 황해도 장연군 신화리에서 소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신화리 범석동에서의 유년 시절을 추억한 글이 남아 있다.
1916년(17세)
평양 숭실중학교에 재학 중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다. 노자영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아래서 누이와 단 둘이 자라났는데, 어머니 별세한 지 2년 만에 누이 또한 세상을 떠난다. 1924년 1월자로 서명되어 있는 시 〈보름달〉에서 “어머니 가신 지 여덟 해 만이요/ 누나가 죽은 지 여섯 해 만에”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노자영의 경우 이 진술을 작가의 개인사를 지칭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노자영이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보니 이미 어머니는 숨진 후였고, 베개 속에는 아들에게 전하는 은화 1백 30원이 간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어머니 무덤〉 등 여러 편의 시와 수필을 통해 표현된다. 문학에 뜻을 두기 시작한 것 역시 이즈음을 전후해서이다. “17세 때 《청춘》 잡지를 보고 또는 《해당화》를 읽으며 문학이 좋다는 것을 생각하였고 또는 춘원의 《무정》을 읽고 문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1918년(19세)
‘20세 전후의 청년 시대’,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후 장연군 죽계리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 그러나 문학에의 열망과 방랑에의 동경 때문에 교사로 근무하는 내내 내적 갈등에 시달린다. 1918년부터 《기독신보》, 1919년부터는 《매일신보》를 통해 시와 수필, 짤막한 단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지금 찾을 수 있는 최초의 글은 《기독신보》 1918년 7월 10일자에 실린 〈세느 하반河畔에서〉라는 번역문이다. 프랑스 소설가 졸라의 글을 번역한 것이었다. 노자영이 수차례에 걸쳐 ‘첫 작품’으로 회고하고 있는 〈무화과같이 떨어지는 생명〉 혹은 〈무화과같이 속히 지는 생명〉이란 《기독신보》 1919년 6월 25일자에 실린 〈죽음의 사자〉라는 시로 보인다. 《매일신보》에 실린 글은 대개 현상문예에 투고, 당선된 결과였는데, 첫 상금으로 2원을 받아서는 모시 두루마기를 해 입었다고 한다.
1920년(21세)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이 해 8월 서울행을 단행한다. 서울로 거주를 옮긴 후에는 한성도서주식회사에 입사, 잡지 《서울》과 《학생》의 편집에 관여하면서 외국 사상을 소개하는 글 등을 발표하기도 한다. 5월에는 동인지 《창조》에 〈문예에서 무엇을 구하는가〉라는 짤막한 평문을 발표한다. 최대 자본을 자랑한 출판사 한성도서주식회사에 근무한 까닭인지 문인들과의 교유도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1921년(22세)
5월에 창간된 시 동인지 《장미촌》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한성도서주식회사의 긴축 방침에 의해 편집부가 폐지되면서 퇴사,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4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이 전직轉職도 1921~22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주로 경찰서에 출입하는 사회부 기자로서 분주한 생활을 했다.
1922년(23세)
홍사용·박종화·나도향·박영희·이상화 등과 함께 《백조》를 창간하면서 동인으로 활동한다.
1923년(24세)
일찍이 한성도서주식회사 입사를 주선했던 영업국장 김진헌의 권유로 “여러 친구에게서 연애 서간 1편씩 모아가지고 또는 나도 서너 편 써서”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을 발행한다. 중편소설 《반항》도 단행본으로 출간한다. 이 두 책은 모두 처음에 ‘미국 선교사 오은서’ 명의로 출간되었으나, 뜻밖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노자영을 일약 대중적 스타로 만든다. 그러나 《반항》의 일부 내용이 구리야가와 하쿠손의 글을 표절한 것이라고 시빗거리가 되면서 《백조》 동인에서 제명당하는 등, 노자영으로서는 영광과 불명예가 교차한 한 해였다.
1924년(25세)
연초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 〈잠!〉이 베를렌느 시의 표절이라는 이유로 염상섭의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노자영은 오해였음을 해명하지만, 염상섭이 별다른 확인 없이 표절이라며 공격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노자영에 대해 경색되어 있던 문단의 분위기를 알려주고 있다 할 것이다. 논란 당시까지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던 노자영은 이 해 중에 퇴사한 후 출판사 청조사靑鳥社를 설립한다. 청조사에서는 노자영의 여러 글을 순서 없이 엮은 각종 문집과 《천사의 선물》 《소공자》 등 번역 동화류를 주로 발간했는데, 판매는 대체로 성공적이었던 듯 보인다.
1925년(26세)
상업적 성공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으로 건너간다. 여름방학 당시 귀국을 알리는 기사가 《조선문단》에 목격된다. 후일 이력에는 일본 니혼(日本) 대학에서 수학했다고 쓰는데, 아마 이 당시의 일이 아닐까 싶다. 일본 문단에서 미문가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자화자찬한 것을 방인근·최서해가 함께 글을 써 논박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또한 이 무렵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26년(27세)
김을한 및 조중곤과의 논전에 휘말린다. 김을한은 난잡한 사랑 이야기만 써 대는 작가로 노자영을 공격하면서 극단적인 악평을 남겼고, 조중곤은 노자영은 ‘문사文士’가 아니라 ‘문사蚊士’라는 조롱을 유명하게 했다. 이 해 떠들썩했던 논전 중 하나였으나 개인적 감정만 노출시켰다고 하여 문학사에 기록되지는 못했다. 노자영 자신은 시에 서명된 날짜를 볼 때 4~5월에 일본에 머물다가 잠시 귀국, 10월에 다시 도일渡日한다.
1927년(28세)
봄에 폐병이 악화되어 귀국, 본격적인 투병 생활에 들어간다. 이 당시에 대한 진술은 ‘소화 2년과(1927)’과 ‘1928년’으로 다소 혼동되어 있다. 사회적으로는 현실 의식이 고조되면서 노자영의 인기가 떨어졌을 무렵이고 병까지 깊어, 투병 중에 있던 3년간은 고독하고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해 이화여전 음악과를 졸업한 이준숙과 결혼식을 올린다. 1940년의 설문조사 응답에 ‘13년 전’ 결혼했으며 주례는 김영섭 목사가 맡았다는 진술이 있다. 충청남도 공주 출신이었던 이준숙은 당시 목사였던 이용주의 딸이었으며, 노자영보다 7세 연하로, 독창곡 작사를 노자영이 맡아준 것이 인연이 되어 1924년부터 만나온 사이였다. 결혼 당시 노자영은 폐병 제 3기의 중환자였으며, 이준숙은 “부모에게도 쫓겨”나는 곤란을 딛고 노자영과 결혼했다고 한다.
1928년(29세)
청조사를 처분한 후 서울 교외의 절로 요양을 떠난다. 6월 7일의 일이었다고 한다. 다소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성북동으로 이사,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영이’라고 부른 첫 아이를 출산한다.
1929년(30세)
투병 중이었으나 그의 이름을 걸고 음악 선곡집 〈장미 속에 숨은 벌〉이 발매되었다고 한다. 노자영은 본래 음악,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에 취미가 깊었다.
1931년(32세)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문단 및 출판계에 복귀한다.
1934년(35세)
7월에 《신인문학》이라는 잡지를 창간, 매호 소설과 수필 외 시사 원고까지 집필하는 한편 주간 역할도 담당한다. 《신인문학》은 노자영은 《신인문학》을 가리켜 “문학에 대한 나의 재출발”이라면서도 “그러나 이것이 나의 본의는 아니고 또는 그 잡지에 쓰는 글도 나의 본의의 글은 아니”라고 토로하고 있다.
1935년(36세)
《신인문학》에서 신인 작가의 투고작을 계용묵이 쓴 것으로 잘못 게재, 항의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계용묵을 공격한 일이 생겨 구설수에 오른다. 개인적으로는 갓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를 병으로 잃는다. 〈애아愛兒 영주를 잃고〉라는 글이 《신인문학》에 보인다.
1936년(37세)
《신인문학》이 종간된다.
1937년(38세)
1월 비교적 늦은 나이로 조선일보사 출판부에 입사한다. 입사 후에는 《조광》과 《여성》 편집을 담당했으며, 주로 매달 1~2회씩 열린 좌담회 기사를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함대훈과 함께 실무를 담당했지만 다른 교우 관계는 미미했으며, 점심도 혼자 시켜 먹었고 간혹 군밤이나 사과·배 같은 간식을 사 와서도 혼자 드는 등 고립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는 여전히 방랑 생활에의 동경을 토로하면서도 “처자가 있으니 일생을 거기 바칠 수밖에 없다”고 다짐하는 문장이 자주 눈에 띈다. 이 무렵 아내 이준숙은 안국동에 미모사서점이라는 이름의 책방을 내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인생특급〉을 연재, 자주 독자로부터의 편지를 받는 등 큰 인기를 누린다.
1940년(41세)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되면서 조선일보사에서 퇴사한다. 다시 출판사 창립을 준비하고 지인들에게 원고 청탁까지 해 놓은 상태에서, 10월, 시내에 나갔다 돌아와 갑자기 앓아누운 후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난다. 뇌막염이라는 진단이 있었으나 병명조차 확실치 않은 상태였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준숙과 세 아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