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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침실로(외)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43년 타계할 때까지 줄기차게 민족을 상상하고 그 범주 안에서 치열한 창작을 해온 매우 중요한 시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했고 다만 사후死後에 백기만白基萬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1951)이 출간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시인 스스로 생전에 정리하여 확정한 원본은 없는 상태이다. 1. 이 책에서는 가능한 한 시인이 살아서 발표한 원래 지면을 찾아 그 원문原文대로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상화와 고월》에 백기만이 수록한 것을 따랐다. 2. 표기법은 가능한 한 발표 당시의 것을 충실하게 따르되 다만 띄어쓰기나 구두점, 철자법 등에서 가독성을 고려하여 현대어에 맞도록 고쳐 실었다. 3. ..
상화尙火 이상화李相和는 1920년대 초반부터 1943년 타계할 때까지 줄기차게 민족을 상상하고 그 범주 안에서 치열한 창작을 해온 매우 중요한 시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못했고 다만 사후死後에 백기만白基萬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1951)이 출간되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시인 스스로 생전에 정리하여 확정한 원본은 없는 상태이다.
1. 이 책에서는 가능한 한 시인이 살아서 발표한 원래 지면을 찾아 그 원문原文대로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그렇지 못한 작품들은 《상화와 고월》에 백기만이 수록한 것을 따랐다.
2. 표기법은 가능한 한 발표 당시의 것을 충실하게 따르되 다만 띄어쓰기나 구두점, 철자법 등에서 가독성을 고려하여 현대어에 맞도록 고쳐 실었다.
3. 원문에서 한자를 사용한 것 가운데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은 괄호 안으로 들여 표기하였다. 하지만 한글표기 상태로도 맥락 파악이 분명한 것은 한자 병용을 하지 않았다.
4. 산문의 경우도, 발표 원문을 찾아 역시 현대어에 맞게끔 고쳤고 한글 표기를 원칙으로 하였다. 산문의 경우는 시와는 달리 띄어쓰기, 구두점, 철자법, 낱말 등에 대하여 더욱 가독성을 고려하여 현대어 문법에 맞게 고쳤다.
5. 작품은 시와 산문 모두 발표순으로 배열하였다.
1901년(1세)
음력 4월 5일, 경북 대구시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본관은 경주이다.

1907년(7세)
아버지 이시우 별세하다. 이때부터 백부 이일우李一雨의 가르침에 따라 자라게 되다.

1914년(14세)
백부 이일우의 가르침에 따라 집 사랑을 사숙私塾으로 하여 대소가大小家의 자제 십여 명과 함께 수학을 하다. 백부의 엄격한 훈도를 받다.

1915년(15세)
백부 이일우와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상경하다. 경성중앙학교(현재의 중동중고교)에 입학하다. 서울 계동桂洞 32번지 전진한錢鎭漢의 집에 하숙하다.

1917년(17세)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동생 이상백李相伯 등과 함께 습작집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고 하나 현재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1918년(18세)
중앙학교 3년을 수료하고 학업을 중단하다. 대구로 내려와 독서와 명상으로 지내다 금강산과 강원도 일대를 3개월간 방랑하다.

1919년(19세)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함께 기미독립운동에 참가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모의하다 사전 발각되어 탈출하다. 서울 서대문 밖 냉동冷洞 92번지에서 고향 친구인 성악가 박태원朴泰元의 하숙에 머물다. 음력 10월 13일 백부의 강권으로 서온순徐溫順과 결혼하다. 이때 이미 상화는 여고보를 마친 재원 손필련孫畢蓮과 만나다.

1921년(21세)
소설가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와 만나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에 가담하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다.

1922년(22세)
《백조》 창간호에 〈말세末世의 희탄欷嘆〉을 발표하다. 이후 〈단조單調〉, 〈가을의 풍경風景〉 등을 발표하다. 이해 프랑스에 유학할 생각으로 일본에 건너가다. 이 시절에 또 다른 여인 유보화柳寶華와 만나다.

1923년(23세)
관동 대지진 사건으로 한인 학살의 참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유학을 단념하다.

1924년(24세)
귀국하여 서울 가회동 취운정翠雲亭에 거처를 정하고 현진건, 홍사용, 박종화, 나도향, 김팔봉 등과 어울리다.

1925년(25세)
〈가장 비통悲痛한 기욕祈慾〉, 〈빈촌貧村의 밤〉, 〈이별離別을 하느니〉, 〈폭풍우暴風雨를 기다리는 마음〉, 〈금강송가金剛頌歌〉 등 생애에서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 이 해 8월에 결성된 카프(KAPF)에 가담하다.

1926년(26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다. 유보화의 임종을 지키다. 장남 용희 태어나다.

1927년(27세)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피검되다. 고문 폭행 등의 고초를 겪다. 이때부터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당하다. 고향으로 내려가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지사들의 교유처가 되게 하다.

1934년(34세)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하였으나 경영 미숙으로 1년 만에 문을 닫다. 차남 충희 태어나다.

1937년(37세)
북경으로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가서 3개월간 머물다. 귀국 후 일경日警에게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이후 20일간 고문 폭행을 당하고 풀려나다. 출감하여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 강사로 근무하다. 이때 교남학교에 권투부를 창설하여 그 후 ‘태백구락부’의 모태가 되게 하다.

1940년(40세)
교남학교 사직 이후 《춘향전》 영역, 《국문학사》 등을 집필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다.

1943년(43세)
4월 25일(음 3월 21일) 타계하다. 이 해에 백기만 등의 노력으로 ‘詩人 白啞 李公相和之墓’라는 비석이 세워지다.

1948년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시비詩碑가 세워지다.

1951년
백기만에 의해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이 간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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